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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May 10. 2020

삶의 틈바구니의 무게

김애란, <바깥은 여름> 북리뷰

나에게 소설이 최고의 영역인 이유는 흥미진진한 메인 서사가 주는 재미와 함께 그 사이에 켜켜이 담겨 있는 인생의 묘미, 혹은 삶의 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틈을 통해 그동안 간과하고 지냈던, 또는 생각지 못했던 삶의 가치들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내가 즐기는 소설은 주로 중ㆍ장편 쪽이다. 적당히 호흡이 긴, 그럴싸한 서사를 따라가며 누군가의 삶의 1막쯤을 읽고 나면 적당한 여운과 함께 삶의 틈바구니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반면, 나는 여간해선 단편 소설을 즐기진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단편은 삶의 틈바구니 자체이다. 짤막한 삶의 단편 속에 한참 동안, 혹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을 삶의 여백들로만 치밀하게 짜여진, 숨막히는 단면의 조합이다. 마치 비언어의 세계를 언어화한 것 같은, 그냥 간과해도 좋을 것들만을 굳이 끌어다 직조해 놓아 단 한 문장도 허투루 스쳐가기가 힘이 들게 한다. 뉴스의 워딩만 기억하고 맥락은 무관심한 이들에게 단편을 읽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삶의 틈바구니는 늘 인생의 비극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김애란의 단편들은 ‘부재’와 ‘결핍’, ‘부조리’ 등을 상기시키며 단편 특유의 삶의 여백들을 늘어놓아 나를 우울하게 한다. 복분자로 얼룩진 벽지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부부의 삶을 비유하지만(입동) 부부는 죽은 아들이 남긴 낙서로 인해 엉망진창의 삶을 묻어 버릴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삶의 여백 속에 동결된다. 추억에 대한 환멸과 동경의 양가적 감정이 상기되는 부분이다. 금욕과 욕망 사이에서 인생 최초의 갈등을 겪던 어린 찬성(노찬성과 에반)은 아버지와 에반의 부재를 실감하며 죽음의 의미를 차츰 이해하게 될 것이다. 통과의례 혹은 성장의 이름으로 말이다. 도저히 수용될 것 같지 않던 남편의 부재는 삐뚤빼뚤한 편지 한 장을 통해 차츰 이해의 영역으로 편입될 것이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결국 불행의 치유는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면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삶의 틈바구니는 때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또는 부조리하다싶게 어긋난 것들로 채워지기도 한다. 관계를 끝장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제철이 지나버린 줄돔, 인생 곡선의 불균형, 가치관의 차이(건너편)... 삶의 미세한 균열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 삶의 방향을 돌려놓고 우리를 조롱한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오점을 직시하지 못한다. 추문으로 얼룩진 아버지를 경멸하고 곽 교수의 낯두꺼운 속물근성을 조소하면서도 정작 ‘더블폴트’라는 말을 떠올리고서야 스스로의 위선에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풍경의 쓸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오점을 알아채기란 더더욱 어렵다. 웃음과 경악, 과연 어느 것을 가리기 위한 손짓인지를 알아챌 만큼 자식에 대해 예민한 촉수를 가진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가리는 손) 가해와 피해의 경계,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하며 무모한 것인가를 각성하게 한다.


과연 단편들이 선사하는 삶의 여백들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그 여백들을 일일이 상대하노라면 인생이 너무 무거워진다. 존재의 가벼움을 지극히 잘 참고자 하는 나로서는 그저 바람에 흩날리지만 않을 무게면 된다. 단편은 당분간 사절이다. 유혹자가 레이먼드 카버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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