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되는 것들에 대하여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북리뷰
‘다섯째’라는 수식어에 전제된 기대만큼이나 첫째와 둘째, 셋째, 넷째를 조바심 내며 제껴 나가고 드디어 맞닥뜨린 다섯째 아이, 벤 로바트. 그의 출생과 더불어 전개되는 스토리는 기묘하고도 흥미진진 그 자체. 그리고 벤의 패거리들이 바닥에 흩뜨려 놓은 음식 쓰레기들마냥, 이야기는 대책 없이 펼쳐진 채 그대로 문을 닫는다. 그리고 드는 생각. 아 이건 뭘까. 그 옛날 ‘오멘’ 같은 호러물인가. 아님 한 가정의 비극사? 신들의 유전자 놀음으로 태어난 변이 유전자의 부적자(不適者) 생존의 문제? 창발적 진화론? 혹은 문명과 야만?.... 실로 이런저런 해석의 잣대를 들이대게 할 만큼 좋은 먹잇감이었다. 작가는 참으로 영리하게도 ‘벤’의 존재를 모호하고 불투명하게 그려냄으로써 다양한 알레고리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혹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과연 벤은 괴물인가. 네안데르탈인의 외양을 띠고 사피엔스의 세계에 훅 떨어진 그는 참으로 낯설기 짝이 없다. 기괴하게 생긴 두상과 굵고 노르스름한 머리카락, 근육질의 손바닥... 나와 다른 바운더리로 타인을 밀어내는 데 외양만큼 원초적이고도 즉물적인 게 있을까. 이 낯선 아이는 보통의 또래들처럼 기어 다니지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도 않는다. 가지 위의 새를 추격하고 봄꽃들을 짓이기는 아이에게서는 결코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네 아이들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함이다. 그야말로 돌연변이인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껄끄러운 대상이다. 가족들의 단란했던 모임은 벤으로 인하여 해체되고 사랑스럽던 아이들은 하나 둘 집을 떠나고 귀여운 막내였던 폴은 신경증에 시달리는 아이가 된다.
하지만 벤은 과연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기실 벤은 외양이 독특할 뿐 다운증후군이나 유전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문화를 습득하는 방식 역시 독특하긴 하지만 크게 배척당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단어보다 문장을 먼저 사용했다고 해서, 인사말을 정정해 배워야 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감정 노선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기괴한 존재로 몰아가는 것은 부당하다. 그가 고양이와 개를 죽였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양소라 불리는 격리 공간에 갇히고 ‘사육’의 공포를 겪음으로써 더욱 이질적 존재가 된다. 너무나 독특하고 이상하여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 같던 벤이지만 날품팔이 실직자 존의 무리와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고 학교에서도 데릭, 빌리 등과 어울려 무리를 형성하게 됨은 벤이 결코 ‘괴물’로 치부될 수 없음을 반증한다.
애초 괴물이란 무엇인가. 나와 다른 부류로 선을 긋고 타자화하여 배척과 차별의 도구로 유용한 극단적 이름이 아닌가. 모호하고 이상스런 아이로 그려진 벤은 결국 개별적 존재로서의 특이성이 아닌, 정상적(주류적) 바운더리로부터 비껴난 이들의 타자성을 드러내며 이방인, 실향인, 때로는 광인으로 드러나는 아웃사이더 부류를 표상한다. 그리고 벤과 어울렸던 존의 무리와 데릭 역시 주류의 세계로부터 제껴진 인물들이며 이들의 행동 역시 몰이해와 거북함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과연 이상한가. 이들의 행동에 대한 관찰과 묘사는 철저히 해리엇의 시선을 전제로 한다. 작가는 전지적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이미 해리엇(주류 또는 기득권)의 가치관을 통해 벤의 무리들을 관찰함으로써 이들의 행동을 이질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벤을 둘러싼 가족들의 낯선 시선, 노골적인 경계심은 지극히 폭력적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실직자가 되든, 무단결석을 일삼는 낙제 학생이 되든, 해리엇의 막연한 상상에서처럼 도둑질하다 경찰에 잡혀 발길질 당하고 격리되든, 벤의 부류는 결코 해리엇이 속한 영역에 편입될 수 없다. 그리고 이질성을 꼬투리로 인간사회에서의 ‘구별짓기’가 건재하는 한, 또 주류(정상)의 이름으로 상징적 폭력이 꾸준히 행사되는 한, 벤의 유전자는 언제든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발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