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論)할 만한 담(談)
신영복, <담론> 북리뷰
일찍이 공자는 예순이 되어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는 법이 없다고 하였다. 이름하여 이순(耳順). 내게 신영복 선생의 글은 그 어떤 부분을 보아도 눈에 거슬리는 법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면 목순(目順) 혹은 안순(眼順)쯤 될까. 이상하게도 그의 글은 구절구절 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한 15년 전쯤 접한 그의 사색과 철학(「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어쩌면 나의 가치관으로 깊이깊이 내면화된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처구니없던 비극의 20년 세월이 그의 농익은 사색과 간결한 문체로 승화된 만큼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거의 없었노라 감히 말할 수 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부’라는 것, 심지어 폭풍우를 견뎌낸 달팽이조차 공부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것,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지닌 개념적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 한 마리의 제비를 통해 천하에 봄이 왔음을 눈치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바다의 심층을 이해하듯 고전을 통해 인간사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홈통의 비어있음을 통해 바퀴살이 잘 돌아갈 수 있다는 역설적 논리, 늘 꼬리를 적시는 우를 범하는 인간사의 미완, 한 글자가 비뚤어지면 다음 글자로, 한 행이 틀리면 다음 행으로 보완이 되는 삶의 묘미... 사물과 세계에 대한 그의 인식론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건만 조각가가 바위 속에서 형상을 도려내듯 삶의 철학들을 두드러지게 한다.
애초에 관계 속에서 탄생하고 살아가며 소멸해가는, 결코 단독적ㆍ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 관념으로만 떠돌던 불교의 인과론은 그를 통해 ‘인간관계’론으로 두드러지면서 기어코 실천의 개선을 다짐하게 한다. 그 어떤 잘난 지식과 도덕성도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면 관계에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 ‘집단지성’의 가치를 ‘중우(衆愚)’라는 이름으로 외면해 온 나의 교만함에 대하여, 자기 능력의 70%의 위치가 진정한 ‘득위’임을, 히말라야 설산에 사는 토끼는 결코 코끼리보다 클 수 없음을, 큰 바위를 만나면 갈라지고, 웅덩이를 만나면 기다려 채워졌다가 다시 출발하는 것이 ‘물’의 속성임을... 그의 담론은 그동안 수없이 끝장난 나의 인간관계사를 반성하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철학이 나에게 ‘안순(眼順)’의 가치를 지닌 근본적인 까닭은 그의, ‘사람’에 대한 무한긍정 때문인지 모른다. 그가 평생을 해 오고 가장 높은 가치를 두었던 것,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이었던 공.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과 관계의 본질에 대한 성찰... 그 모든 것은 ‘사람’을 향해 있다. 청구회의 추억이 그러했듯 ‘사람’과의 작은 추억들은 뜻밖의 밤길에서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결코 ‘한 발 걸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감방생활에서 부대끼던 그 많은 사람들과의 추억,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한 무한적 애정... 그동안 내가 아무리 그의 철학에 공감하고 고개를 주억거려도 결코 체화할 수 없었던, 그래서 아직은 나에게 ‘안순(眼順)’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과제로 남은 그의 ‘사람’론. 내가 그를 사숙(私淑)하는 까닭이다.
김광석이 떠나고 나서야 그의 콘서트에 가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하였다. 신영복 선생이 타계하고 나서야 그의 강의를 찾아가 듣지 못한 것을 몹시 한탄하였다. 게으름은 늘 뒤늦은 후회를 만든다. 마음에 꽂히는 일은 가급적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