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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May 21. 2020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북리뷰

“7층 건물 지하에서 죽은 지 3주된 시신이 발견되었다. 7층에 살던 60대 모 부인이었는데 부패한 시신에서 악취가 나자 이웃들이 발견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죽은 시신 곁에 10대 남자아이 하나가 살고 있었다는 점. 그 아이는 3주 동안 시신 곁에 머물러 있었으며, 죽은 이의 얼굴에 화장을 덧칠하고, 악취를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향수를 뿌렸다.” 


뉴스 한 토막에 실릴 만한 충격적인 결말이다. 단 몇 줄의 기사로부터 파생될 반응들... 끔찍하다... 아이는 미친 걸까... 죽은 줄도 몰랐던 거 아닐까... 가엾다... 과연 그 아이는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등등... 맥락도 없는 장면은 아무런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고 무책임한 일회성 추측들만이 난무하게 내버려 둘 뿐. 하지만 사건의 단면이 아닌 맥락을 읽어온 우리로서는 모모의 행동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혹시나 그 사연을 궁금해 할 누군가를 위해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나딘의 녹음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모가 ‘빌어먹을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이라 했던 ‘거꾸로 된 세상’으로 말이다.


어린 아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들의 화자는 대개 어린 화자와 성장한 화자가 뒤섞여 있다. 즉, 유년기(청소년기)의 시절을 그리고 있는 듯하지만 당시의 시선이나 생각만으로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었거나 조금은 성장한 화자의 회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상되는 이야기들은 날것 그대로의 사연들이라기보다 성장한 화자의 입장에서 편집된, 자신의 성장을 이끌어온 주요 사건에 대한 기록이자 윤색된 기억들의 나열이다. 


모모는 버려진 사생아다. 생모는 매춘부, 생부로 추정되는 남자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엄마를 죽였을 뿐 아니라 14년 만에 만난 아들이 유태인이 되었다고 기함해 죽는 인간이다. 모모는 제 나이(10살)의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로부터 퇴출되었다. 길거리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며 뭇사람들의 동정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다. 어린 모모를 성적으로 호시탐탐 노리는 남자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 불행들은 모모의 이야기에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우편환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어느덧 돈을 떠나 혈육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로자 아줌마, 모모의 인생철학의 기반을 다져준 하밀 할아버지, 로자 아줌마와 모모를 보살피는 가츠 선생님, 다정하고 인정 많은 여장남자 롤라 아줌마, 힘이 장사인 자움 씨네 형제들, 왈룸바 씨... 이들의 이야기가 주된 관심사다. 


아무리 소설이지만 모모의 주변에는 좋은 이웃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하나같이 소외된 아웃사이더들임에도 인정이 풍년이다... 게다가 모모의 문체는 너무나 발랄하고 때로 그의 유머는 시니컬함을 넘어 유쾌하기까지 하다. 이쯤 되면 모모는 정말 행복한 아이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모모의 친절한 주변인들은 어쩌면 성장한 화자 모모에게 선택된 이들이다. 결핍과 차별, 거짓과 불법으로 휘감긴 모모의 환경은 모모의 이야기에서 과감히 삭제된다. 그것들은 모모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까닭이다. 모모의 기억에 소환되는 이들은 그의 신산했던 삶을 어쩌면 충만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화자 모모는 자신을 키운 팔 할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모모가 진정으로 성장하기 위해 치러야 할 몫은 여전히 남아 있다. 10살 모모는 하루  아침에 14살이 되었다.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성장을 ‘당해’ 버린 것이다. 10살 모모의 눈에 비친 생은 비루하지만 따뜻하고 정겨운 이들이 함께 한 것이었다. 하지만 14살로 성장 ‘당한’ 모모에게 있어 생은 열다섯 풋풋했던 소녀 로자를 예순 다섯의 늙고 육중한,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로 짓밟아 버린 잔인한 존재임이 부각된다. 더 이상 10살일 수 없는 14살의 모모는 이 잔인하고 매몰찬 생과의 대면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모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추억과 사랑을 담아 성장 의식을 치른다. 로자 아줌마와 보낸 3주라는 시간은 모모가 비로소 14살이 되기 위한 유예의 시간이다. 온갖 색조 화장품으로 로자 아줌마의 얼굴을 칠하고 향수를 퍼부어도 자연의 법칙은 물러서지 않는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열다섯의 생이 모모의 눈앞에 성큼 다가온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말’이라는 하밀 할아버지의 얘기에 따라, ‘끔찍했던 일들도, 일단 입 밖에 내고 나면 별게 아닌 법’이 된다고 믿는 모모는 자신에게 불현 듯 다가온 비극적 성장의 사연을 담담하고도 아름답게 서술해 놓았다.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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