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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May 23. 2020

돈으로 사면 '안 되는' 것들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북리뷰

책의 3분의 1쯤 되면 독자들은 알게 된다.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영역에서 훨씬 많은 수의,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조차 자본의 논리가 통용되고 있었음을. 물론 감옥살이를 하는 재벌의 감방이 호화 개인감방으로 업그레이드되고, 대리모 서비스로 유전자를 보존할 수 있으며, 새로 출시될 약품에 약간의 위험성만 감수하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는 배후에 자본의 위력이 작용하고 있음은 짐작하고 있던 바다.


그러나 1회용 문신으로 광고 문구를 새기고, 선착순이 아닌 새치기에 동참함으로써, 대리 사과 서비스와 청소부 생명보험을 대납함으로써, 심지어 유명인사의 사망 시기를 때려 맞힘으로써, 경기를 중계하던 아나운서의 맥락 없는 기업홍보, TV광고가 인쇄된 계란.... 등 일상의 곳곳 구석구석까지 돈과 맞닿아 있음을 확인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동시에 아하~ 이런 기막힌 알바가 있었다니...의 경탄에 이르기까지 감회가 새로워진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어느덧 우리의 삶은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잠식되었음을.


샌델의 예시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이미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독자는 알게 된다.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돈으로 사면 안 되는 것들’을 얘기하고 싶어함을 말이다. 그리고 샌델은 그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요약해 누누이 강조한다. 첫째, 공정성(불평등)의 문제  둘째, 부패의 문제 그것이다.


우선 공정성의 문제, 아무리 거의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과정에 불평등이 두드러진다면,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없는 자’에게 자괴감을 안겨 준다면, 그것은 돈으로 해결되는 과정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 가령 소수를 위한 전담 진료로 인해 수많은 응급환자들이 일반 의사의 붐비는 진료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면, 몸이 아픈 자녀를 위해 부모가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신체에 광고 문신을 새기고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불평등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둘째, 부패의 문제는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접근이다. 재화에 대한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지 말 것, 가령 상업주의가 학교로 침입할 때 교육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 신체에 새기는 문신 광고는 인간을 사물화하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것, 전략적으로 튀어나오는 특정 단어의 광고는 책의 품위를 변질시키고 저자와 독자의 관계를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샌델이 제시하는 이 두 가지 이유가 타당성을 가지려면 두 가지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왜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재화의 본질은 훼손(부패)되면 안 되는가. 전자의 문제는 이미 중세에서 근대를 넘어오는 동안 흘린 수많은 피의 대가로 그 타당성을 승인받은 듯 보이지만, 정작 자본주의에 찌든 우리는 이 명제에 대해 이미 두루두루 질끈 눈을 감아 버리고(eyes wide shut)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럽고 치사한들 먹고 산다는 게 그렇지... 라는(현실과 당위의 괴리). 후자의 문제는 보다 추상적이고 도덕적이며 가치에 관련된 문제이다. 이런 저런 타락한 사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무엇...이 과연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 이 두 가지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다시 근원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인지 모른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샌델의 모습이, 이미 성인이 되었지만 망나니로 큰 자식 놈을 어떻게든 타일러 보는 늙은 부모의 모습으로 애처롭게 보인다는 것. 소싯적부터 똑똑하고 자유분방하여 아낌없는 칭찬으로 큰 자식이 어느덧 도를 넘어 버리자 이건 아니지 않니? 정도가 필요하잖아... 하는 뒷북. 특히나 후자의 문제는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고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어진다. 무엇으로 어떻게? 자연스러운 계도? 문화캠페인? 자본이 극대화된 이 마당에? 과연 아날로그적 정신문화가 5G급 물질문화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샌델은 후자의 문제에 보다 방점을 두는 듯 보이고, 무엇이 과연 인간 삶에서 지켜져야 할 근원적 가치인가에 대한 물음과 대화가 필요함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한숨과 회의가 먼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전자의 문제는 다르다. 우리가 공정과 공평의 필요성을 함께 전제하고 있는 한, 공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순 없지만, 적어도 이건 공정하지 않다에 대한 논의는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평등해질 수 있는가, 공정성의 잣대는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 에 대한 갑론을박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정치의 문제로 귀결된다. 정치 개혁, 유권자의 변화, 깨어있는 민주시민의식, 지식인의 역할.... 중 어느 하나라도 일단 시작되면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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