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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ul 04. 2020

어느 시대에도 질병은 양산된다.

한병철, <피로사회> 북리뷰

90년대의 대한민국은 ‘보통사람’이 부각되는 시대였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빛나는 시기에 있었으며 (적어도 IMF 이전까지는), 예술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 담론이 유행처럼 번졌다. ‘해체’를 화두로 근대를 이루는 일체의 관념들 - 이성과 비이성, 합리와 비합리, 주류와 비주류 등 이분법적 서열 -이 무너졌고, 인간의 삶을 옥죄는 온갖 권위와 규율, 통제의 시대가 비아냥과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자, 이 완벽한 시대 속에서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 이제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나는 참으로 순진하고도 어리석게도 인류의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어 버렸던 것이다. 역사의 첨단에 섰다고 착각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에 대한 맹목적인 낙관론에 빠져 있었다. 「자본론」의 예측이 빗나가길 기원하면서, 푸코의 충고를 염두에 두면서, ‘탈주’하는 인간의 자유본성을 너무나 맹신한 나머지, 등잔 밑을 제대로 들여다 볼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장밋빛 착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회 깊숙이 들어와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사회의 주류 세대층이 되어 가면서, 나는 그 잘나 보였던 시대가 결코 녹록지 않음을, 아니 너무도 심각하게 나 자신과 어긋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 개인적 삶 자체가 결코 행복하다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진화해 가고 있었고,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히 널려 있었으며(그런데 나는 못하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SNS에서는 ‘굿 모닝’이 필연인 듯 외쳐댔고(아침형 인간이 아닌 나는 아침이 결코 ‘굿’일 리가 없었..) 주변에서는 ‘긍정적’인 인물들로 넘쳐났다. 보편적 삶을 살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삶의 이미지 앞에서 괜시리 주눅 들고 어색하기만 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여행을 하고 끊임없이 떠들어대도 삶은 갈수록 공허했다. 이것은 과연 개인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시대의 문제였을까.


철학이란 참으로 흥미로우면서도 종종 위안이 되곤 한다.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였고, 누군가는 그 원인을 파헤쳐 놓았으며, 또 누군가는 그 해답을 제시해 놓기도 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 삶의 병리 현상이 시대적 병리 현상의 일부임을 인식하는 순간, 조금은 면책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피로사회」를 통해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되었다는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은 그 두 가지 성향이 공존하고 있어 삶이 더 팍팍하고 위태롭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징후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고, 대책도 없이 밤새 글을 쓰던 나의 백수시절이 왜 그리도 그립고 행복하게 느껴졌는지를 똑똑히 알게 되었으며 오랜 벗들과의 만남이 주는 가치를 절감하게 되었다. 풍요와 과잉의 부작용 속에서 헤어나는 방법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시대적 병리 현상은 있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것이 그대로 고여 있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해체’와 ‘재배치’의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기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자아가 줄어들고 세계의 증대’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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