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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un 18. 2020

권태의 끝

걷는,사람-제주 올레 4코스

3코스의 끝, 표선은 4코스의 시작이다.

어제 물맛을 본 발바닥, 오늘은 그 주변머리만 밟아야 한다. 주구장창... 해안으로만 이어진 4코스는 이상하게 기억에 없다. 하지만 함께 하는 이들이 다르니 오늘의 기억은 다르게 적힐지도. 과연.


비행기에서 내려 제주 해안을 달리는 순간, 누구나 외친다. "와, 바다다."

내륙의 촌놈들은 탁 트인 수평선을 보는 순간, 요동 땅이라도 만난 듯 통곡(까지는 아니라도)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하루,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는 동안 눈에 흠뻑 담긴 바다는 이제 '아, 바다' 하는 나직한 음성으로 바뀌고, 종내에는 그저 늘상 내 주변에 있어 왔던 백그라운드마냥 여기는 것이다. 돌아가는 순간 그리워할 것을 알면서도.


그러니 줄곧 바당길로만 이어진 코스에 불평은 삼갈것.


바다로 가는 길


바다


바다..


그리고 바다...


또 바다....


잠시 옛 등대를 만나고


물질이 한창인 해녀들의 숨비소리에 혹 했다가


꽃과 시로 이루어진 길을 지나면


다시 바다..


예쁘장한 카페에 한눈을 팔았다가도


아기귤과 새로운 들꽃들(실유카, 마삭줄)에 눈을 두었다가도


어김없이 이어지는 바다는


밋밋하고 지루던 대화와 함께 망각의 영역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삶은... 권태의 연속....


멀쩡했던 담장을 바르고, 부수고, 또다시 돌벽을 쌓는 것은 무엇이든 해보려는 발버둥이다.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한 몸부림.


이번 여정에 나는 나의 테스트 거리를 갖고 왔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되면 되고 안되면 그저 마는 것으로 여겼다. 실패한다 해도 그만인...

헌데, 나의 무의식의 노선은 나의 에고와는 사뭇 달랐던 모양이다. 늘 도망치듯 쫓겨가듯 왔다가, 또다시 진저리를 치며 돌아가던 나의 여정에 결이 다른 추임새 하나가 곁들여졌다. 그리고 그 이질직인 빛깔로 내 무채색의 삶이 조금은 다채로워질 것만 같다. 내 똬리를 틀던 시간의 소용돌이를 조금은 벗어나고 싶어졌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아무리 지루했어도 길은 끝난다. 끝나면 그뿐이다.

 

내일은 또 어떤 여정이 기다릴지 알 수 없다. 오늘보다 다채롭다면 그것으로 오늘의 지루한 몫은 다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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