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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un 19. 2020

혼자걷는 길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걷는,사람-제주 올레 5코스

오늘의 시작은 역시 어제의 끝지점이다.


남원포구. 어제는 지루함의 종점이었다면 오늘은 새로운 날의 기점이 된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입구에,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것만 같다고 생각한 사람과, 아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모여 걷는다.


오늘도 바다로 이어지는 여정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공천포가 있는 한 5코스는 특별하다.


익숙한 바닷길과 흐린 하늘.


'큰엉(큰형 아니고)'을 알리는 표지. 바닷길 절벽에 뚫려 바위그늘을 만들어주는 '엉'은 제주 바닷가 곳곳에 자잘하게 있지만 이곳의 엉은 큰가 보다. 하지만 직접 내려가 볼 수 없다는 게 단점. 10코스 산방산 둘레의 바닷가에선 잠깐 들어가 쉴 수 있는 자잘한 '엉'이 있다.


산책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꽤 눈에 띄었다. 이젠 코로나19와의 대치도 장기전으로 접어든 까닭이다.



먼나무일까요? 먼나무요. 하는 시시껄렁한 농담들을 벗삼아


웨딩컷을 찍으려는 이들 사이로 잠시 잠깐 한반도를 훔친다.


이름을 궁금하게 만드는 꽃이다. 핫립세이지. 설마 빨간 입술? 그렇다. Hotlipsage. 이름을 기억하고 나니 그 존재감이 뚜렷해짐은 물론 더욱 더 많은 실물들을 알아챌 수 있게 된다.


1월이었다면 한창 붉은 동백으로 가득했을 위미백군락지다. 하지만 지금은 동백기름을 향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있을 뿐.


6월 서귀포의 거리는 우뭇가사리 말리기가 한창이다. 이게 우뭇가사리라고? 엄마가 여름이면 콩국에 말아주던 그 젤리같은 국수? 끝내 못미더운 눈초리를 날리며 우뭇가사리를 말리던 할망에게 묻는다. 우뭇가사리 맞수꽈?


삶았다, 말렸다, 삶기를 반복하며 묵 상태로 만들어 먹는 것이 그동안 보았던 우뭇가사리의 제조법. 한평생 이런 것도 모르고 살 뻔했다.


너무나 흔하게 눈에 띄지만 정작 이름을 알지 못하는 너. 자주색달개비. 이름도 참 이쁘구나.


빨간색 솔이 길쭉하게 달린 너는 병 닦기에 유용하겠구나. 그리하여 이름은 '병솔나무'.

못 믿겠다면 영어이름 'Bottle brush'


어제와 비슷한 바닷길을 걷는데도,


오늘이 더 즐거운 까닭은,

아기자기한 코스와, 우연한 동행과, 유쾌한 기운의 시너지 때문일까. 숨막히는 일상으로부터 도망쳐 아침에 도착했다는 동행의 사연이 남 같지 않다. 조퇴를 하자마자 공항으로 직진, 애월의 일몰을 보고 다음날 올레 한 코스를 걷고 올라갔던 날들을 기억한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그것이 너의 '소확행이냐' 했던 기억.


'조배머들코지'. 일본인의 술수에 속아 부서지고 다시 수습된 모양이 이 동네 명물이 되었다.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한은 여전히 서려 있을까.


하늘하늘한 여름 구절초, 샤스타데이지


위미항에는


저 멀리 납작한 '지귀도'를 향하는 배들이 객들을 기다린다.


정갈하게 널린 빨래는 늘 좋은 피사체다.


푸진 밥상을 받고 나면


괜시리 포즈도 좀 잡아보고


호꼼 느슨해진다.


이쯤되면 지치고 구겨진 다리(脚)를 질질 끌며 다리(橋)를 건너곤 하는데


너른 품의 한라와


쇠소깍의 예고는

오늘의 고단함은 끝났다는 안도와


아름답고도 적적한 종점의 아쉬움을 동시에 들게 한다. 26개의 올레 코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종점이다.

 

홀로 걷는 길은 늘 평타 이상을 치는 안전성을 보장하지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슴 설렐 일도 마음 상할 일도 없이 그저 면의 평안을 기약한다. 차라리 그 평안이 그리울 때가 있을망정 일부러 밋밋한 길을 고집하지는 않으려 한다. 도를 닦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스스로 속(俗)된 길을 걷는 것이 무에 이상한가. 14일의 여정이 끝났다. 가을의 제주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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