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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Jun 06. 2020

그땐 안그랬고, 지금은 그렇다.

걷는,사람-제주 올레 1코스

1코스는 성산의 시흥초등학교가 출발점이다. 오늘이 세번짼데 이전에는 번번이 비가 내렸다. 물론 번번이 걷긴 했지만. 오늘도 날 잔뜩 흐리다. 하지만 오늘 비가 온다 해도 그날들의 재현은 아니다.


초입에 바로 오름이 시작된다. 말미오름... 시작부터 오르막이라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6년 전이다. 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기뻐해야 할까.


심장이 뜀박질을 할 때까지 오르다 보면


철제 간세 녀석이 길 안내를 하


호젓한 오솔길이다. 오늘을 동행 없이 홀로 걷는다. 한여름에 한창 혼자 걷던 때가 있었다. 한여름의 올레길은... 그야말로 극.기.훈.련. '극기'가 되긴 된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념무상의 경지에 오르고 싶다면.


1코스의 명물... 조각보의 예술이 펼쳐진다. 성산일출봉이 보이지 않아도 선명한 밭의 경계가 아기자기하다.


오늘의 식물 스승님은 '모야모'이다. 사진을 올린지 30초도 안되어 실시간으로 답이 온다. 이 아이의 이름은 '꿀풀'. 답이 빨리 온다는 것은  "이것도 모르냐, 쯧" 의 의미 같다.


연이어진 또하나의 오름. 이름하여 '알오름'


오늘도 머나먼 뷰는 안녕~~ 미래가 너무 아득하여 보이지 않는다면


눈앞의 것에 충실해도 좋다. 한 치 앞이라도 볼 수 있는 인생. 하지만 이름은 모르겠다. 모야모? '띠'란다. '띠집' 만드는 그 띠?


너, 잡초 주제에 넘 예쁜 거 아니냐. 작고 노란 별...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돌나물'이라는데, 먹어도 는 건가.


동네책방인데 주인장은 없다. 저 의자에 몰래 앉아 보려다...


팔자가 늘어진 바둑이가... 지만 댕댕이가 아니네. 무슨 고양이 색이 저래? 혼잣말을 하자 녀석이 돌아보았다. 어쩌라구.


어딘가에선 감자꽃이 한창인데...? 시간의 속도는 달라도 감자는 감자다.


종달리에서 이른 점심을 먹는다. 혼자 먹자니 막걸리 한 병이 너무 많다. 아까워서 석 잔을 먹었더니 그후론 비몽사몽. 500ml 막걸리는 안 나오나..


할매 다섯을 만났다. 제주시에서 바다 구경하러 소풍나온 할매들... 작정하고 바리바리 도시락 싸서 나들이 나온 이네들은 방금 전 점심과 막걸리를 잔뜩 먹어치운 내게 삶은 달걀을 내민다. 그것도 2개나ㅠㅠ 냉큼 받아든 것을 후회했다. 벼룩의 간을 내먹지... 할매들은 물었다. "너, 서귀포 사냐?"


물이 빠진 바다는 굉장한 놀이터다.


기다렸다는 듯


성산항쯤 오면, 매서운 바닷바람에 볼이 에는 것 같거나 이글이글 태양에 말라 죽기 직전인데... 역시 6월은 날이 좋구나. 나는 왜 번번이 사서 고생을 했던 걸까.


드디어 일출봉이 성큼 다가선다. 헌데, 진지동굴이 오늘따라 눈에 선명하다. 날도 흐린데.


그림이나 엽서에서 많이 보던 각도


이곳에도 4.3의 상처는 남아 있다. 지난 것은 단지 시간뿐인데 공간의 역사는 너무도 판이하다.


아직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광치기 해변


일출봉의 전형적 자태


"아빠, 아빠도 제주도 같이 가실래?"

"난 제주도 갔다왔어."

"언제?"

"30년 전에"


아버지는 한 번 다녀온 여행지는 다시 방문하지 않는다. 한 번 봤음 됐지, 뭘 또 가냐고. 세상엔 볼 게 얼마든지 더 많지 않냐며. 한 해에도 수십 번 제주를 들락날락하는 자식새끼를 아버지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빠, 같은 공간이라도 매번 갈 때마다 달라.  누구랑 가느냐도 다르지, 계절마다, 날씨마다도 달라. 사람들이 왜 똑같은 산엘 그렇게도 많이 다시 가겠어?"

"그러니까 말이다."

".............."


그래도 아버지는 내가 제주에 올 때마다 잘 다녀오라고 한다.

오늘도 짤막한 전화 한 통.

"뭐하냐?"

"걷고 있지."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잘 걸어."

말하지 않아도 아버진 나의 번뇌를 이해하고 있다.

낮엔 안 그랬는데, 저녁에 떠올리니 눈물이 핑~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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