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남긴 위대한 유산
스티븐 호킹, <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 북리뷰
탈레스는 ‘물’, 엠페도 클레스는 ‘흙, 공기, 물, 불’,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라 하였다.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 옹은 ‘수(數)’라고도 했다. 서양철학사라고 이름 붙은 책들의 첫 자락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소위 만물근원설. 도대체 만물의 근원은 알아서 뭐하려고? 하는 게 늘 내가 던지는 질문이었다. 만물의 시초가 물이건, 불이건, 이 복잡해진 세상 물질들을 새삼 분해할 것이냐 뭐냐, 그 물질의 조상은 따져서 뭐하게...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던 철학사의 1장은 돌아보면 존재의 시원(始原)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대한 것이었다. 즉, 어른이 된 이래 누구에게도 함부로 질문하지 않던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부류의 ‘빅 퀘스천(Big Question)’이었던 셈이다.
경박한 나와는 다르게 뚝심 있는 그들의 빅 퀘스천은 철학과 과학의 진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태생이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던 철학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궁극의 한편을 ‘종교’에 넘겨주어야 했다. 한편, 과학은 자연이라는 같은 재료로 실측과 증명에 올인함으로써 근원적 물음(빅 퀘스천)에 대한 답을 끈질기게 추구해 왔다. 그러는 동안 물리학과 천문학, 생물학... 수학을 곁들인 과학의 몸집은 너무나 거대해졌고 세분화되었다.
그 중 물리학은 빅뱅, 블랙홀, 중력장과 같은 거대 담론으로부터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의 미시적 세계를 오가는 동안 인간 삶을 둘러싼 질문들을 끊임없이 양산해 왔다. 우주의 시원이 빅뱅이라는 가정이 성립되기 위한 조건 블랙홀, 과연 블랙홀은 존재하는가. 우주는 팽창하는가. 빅뱅 이후 탄생한 시간과 공간(관념이 아닌 물리적 실체로서의 시간과 공간이라니), 빛이 휘어지듯 시간도 휘어진다면? 그 와중에 시간 여행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하여. 고전역학을 뒤집는 질문, 인과율이 아닌 확률로 존재하는 세계라니. 3차원을 넘어선 다중역사가설. 한계에 다다른 지구를 떠나 이주해야 할 행성은 어디인가. 이 모든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미래의 인간 존재는 어떤 모습인가...
사실 너무나 단순했던 질문들(Big Questions)은 그 답을 찾는 동안 방대한 과학사에 묻혀 무질서의 궁극(엔트로피 증가)이 되어 버렸다. 호킹은 그 방대한 세계 속에서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 궁금했지만 대놓고 물어 보진 못했던 질문들에 대해 ‘알아서’ 질문하고 그 동안의 과학적 업적을 갈무리해 ‘알아서’ 답변해 주었다. 굳어버린 육체의 전 생애를 정신의 세계에 온전히 전이해 얻은 학문적 갈무리였을 것이다.
여전히 인간은 존재의 시원을 알지 못한다. 끝도 마찬가지다.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여전히 그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과학적 성과를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던 호킹 역시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하고 떠나갔다. 인간은 무지한 채 지구에 내던져졌고 끊임없는 질문을 남긴 채 떠나간다. 다만 그 질문들은 시간의 양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그 깊이가 심오해진다. 과학은 종교나 철학과 달리 그 질문들에 대해 실제적인 입증의 부담을 담당한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어도 영원히 찾으려고 하는 것이 과학적 숙명일지 모른다. 또한 과학의 발달이 인간 삶의 위협을 안고 있어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고독해 보이기도 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미덕 같기도 하다. 떨어진 바위를 묵묵히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운명을 타고났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