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이루며 '반복'하는 것들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 북리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는 인간 복제로 인한 여타의 문제들에 수선을 떨지 않는다. ‘실존’이 아닌 ‘기증’이 존재 이유가 되어도 복제 인간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 노선이 자신과 상관없이 진행되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떠도는 소문에 현혹되어 품어본 희망이 허망하게 좌절되어도 분노하지 않는다. 그동안 보아왔던 Scifi 속 복제인간들의 전형성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너무도 차분하게, 관조적으로 진행되는 ‘캐시’의 서술과 단 두 번의 기증으로 맥없이 죽어간 ‘루시’의 소멸과, 조금은 더 ‘인간적’이었던 ‘토미’의 무력한 몸짓은 이완 맥그리거의 반란(「아일랜드」)이나 룻거 하우어의 비장한 죽음(「블레이드 러너」)을 기대했던 독자로서는 시시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바야흐로 인간이 ‘복제’되는 시대가 왔다고 해서 그리 유난을 떨 게 무엇이란 말인가. 가상으로 설계된 소설 속 1990년대나, 아직은 인간복제가 실현되지 않았던(것으로 알고 있는) 실제 1990년대나 달라질 것이 무에가 있나.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출생과 신분에 따른 계층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불과 150년 전만 해도 노예제는 수천 년 동안 공고히 존재해 오고 있었고, 태생부터 주인에 예속된 노예의 삶은 매매, 공출의 대상이었다. 약 6백만 명의 유태인이 짓밟히고 죽어간 것이 고작 70년 전이다. 인간 복제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시대가 되어도 복제된 인간은 그저 차별의 한 영역을 이룰 뿐이다. 여전히 출생과 환경에 따라서 말이다. 때로는 ‘운’이 좋아 관대한 주인을 만나듯 조금은 더 인간적이고 교양 있는 ‘헤일셤’에서 사육될 수도 있지만, ‘운’이 없으면 그저 의학 재료의 공급자로 사육될 뿐이다. 이른 바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도 여전히 다양한 편견과 차별은 존재해 왔다. 우리는 과연 노숙자, 매춘부, 알콜중독자, 강간범, 사이코패스들을 복제된 인간들보다 얼마나 더 가치롭게 볼 것인가.
실제 인간사회의 매커니즘은 「나를 보내지마」의 세계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바로 ‘교육’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인간 삶의 기본 양식을 넘어 한 사회의 이념, 이데올로기를 전수하는 데 이보다 더 유용한 게 있을까. 교육으로 다져진 세계관은 인간 삶의 전반을 관장할 뿐 아니라 여간해선 깨뜨려지지 않는 공고한 힘을 발휘한다. 소설 속 복제인간들은 폐쇄된 교육의 장에서 성장, 아니 사육된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도저히 발현될 싹수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에게 ‘예술’은 과연 무엇으로 작용하는가. 예술과 창조성으로 복제인간들의 영혼 유무가 판명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영혼이 없다면 그 생명체는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가 말이다) 애초 실제 삶이 거세된, 주입된 정보로부터 파생된 예술이란 것이 모방의 모방 이외에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그 본질을 훼손당한 이들의 ‘예술’은 ‘과학’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철저히 패배한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예술은 현실적 장벽에 대한 저항이나 창조의 영역이 아닌 그저 현실적 고뇌와 슬픔을 위로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리는 복제인간들은 새롭게 등장한 두려움이나 연민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예전부터 인간사회에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마이너적 존재의 한 형태일 뿐이다. 문제는 이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처리’할 것인가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굳건하게 존재하는 구조의 문제, 그리고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각종 패스트푸드점과 주차장, 마트에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무인시스템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장차 전쟁 용병으로 쓰일 로봇, 혹은 인공지능, 또는 복제인간... 이는 과연 누구의 승리를 위해 존재할 것인가. 장기 기증을 위해 복제될 존재, 그것은 과연 누구의 삶을 연장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과연 나를 위해, 나의 가족을 위해 그 가치가 소용될 것인가. 「나를 보내지마」의 가즈오 이시구로는 너무도 나직한 문체를 통해 나로부터 그런 의문들을 추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