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짝, 예리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줄리언 반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북리뷰

by 루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 여행에서도 그렇지만 소위 명화라 불리는 그림 이해에도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먼저 그림을 둘러싼 여러 정보들은 어떨까. 다양한 맥락(역사적, 사회적, 상황적)이나 화가의 전기, 유파... 이들은 각종 미술서적이나 도슨트들의 설명에 꽤나 유용한데 말이다. 19세기 프랑스 미술계의 화두 - 선이냐, 색이냐 -를 염두에 둔다면, 다비드와 인상파의 이해에 도움이 될까.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를 보다 잘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화가 개인의 역사는 그림의 이모저모 파악에 여간 유용한 게 아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공화주의자 마네를 기억했을 때 보다 흥미롭게 읽힌다. 쿠르베의 예술적 지향점(사실주의)을 알고 있다면 버려진 낭만주의(기타, 단검, 깃털달린 모자)를 해독해 낼 수 있다. (<화실>) ‘수동적 공격성을 가진 간수에게 구속되어’ 살아간 보나르의 삶은 말년에 그린 그의 누드화들이 에로틱하지 않아 보였던 까닭을 해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을 둘러싼 이런 정보들에 오류가 있다면? 그리고 그 오류가 시대의 물살을 타고 마치 진리인 양 굳어졌다면? 당장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에 대한 바사리의 낭설만 해도 알 일이다. 혹은 그 정보들이 사실이었다 해도 작품의 이해에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도움은커녕 선입견만 굳힌다면? 아름답고도 슬픈, 드가의 발레리나들은 평생 여혐(여성혐오)을 품은 화가의 병적 산물이란 말인가. 표방하는 바(사실주의)와 실제 성향(낭만주의)의 괴리 속에서 우리는 쿠르베의 그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게다가 “숙녀의 임무는 남자의 사색적 합리성을 감정으로 교정하는 것이다.”라는 개소리를 해댄 작자임을 알게 된 이상 그의 그림이 곱게 보일까. 행복하고 단란했던 삶과 칙칙하고 괴상망측한 작품 사이에서 우리는 르동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평온하고 애정이 충만한 노모의 초상에 감동하는 동안 지하에서 프로이트(거짓 감정 혐오자)옹이 혀를 내두르고 있다면?


그러니 우리는 또 다른 ‘알아야 할’ 것이 필요해진다. 책의 첫 챕터에서 줄리언 반스는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이해하기 위해 맥락의 재현을 시도한다. 제리코는 1816년에 있었던 프랑스 전함의 침몰 사건을 토대로 그림을 구상한 바 있었다. 2020년 현재, 우리 눈앞에 <메두사의 뗏목>이 덩그러니 놓였다고 하자. 우리에게는 침몰한 메두사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제리코가 그림을 위해 했다던 노력들(스케치, 밀랍모형의 제조, 빡빡 머리 밀기 등)에 대한 기록도 존재한다. 하지만 제리코가 그림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구체적 상황 맥락에 대한 정보는 우리에게 없다. 저자는 제리코가 남긴 그림을 보면서 화가가 사건 기록들로부터 그림을 완성해 가기까지의 상황 맥락을 나름대로 추리해 간다. 화가가 의도적으로 배제했을 것들과 화가가 염두에 두었을 것들을 그럴싸한 논리로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저자의 예리한 눈은 제리코의 그림이 구조 직전의 희망적 상황이 아님을 간파한다. 구조선은 이들이 알아채기도 전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말이다. 여기에 저자는 하나를 더 보태 독자들을 경악하게 한다. 시신에 한손을 얹은 절망적인 노인은 우골리노 백작을 통한 식인의 알레고리였음을. 그리하여 이 그림은 처절하고도 절망적인 난파의 상황에 대한 화가의 기록임을. 줄리언 반스의 이 추론에는 소위 ‘지식의 눈’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꽤 유효하다. 구조 직전이냐, 멀어져 간 구조선이냐의 간극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꽤나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골리노 백작의 소환 여부는 감상의 깊이를 충분히 좌우할 만한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이 두 번째 것에는 감상자들의 보다 예리하고도 집요한 참여가 요구된다. 줄리언 반스는 그림의 합리성을 위해 물위로 떠오른 뗏목, 안정적인 구도를 위해 건져진 시신들, 낙관자와 비관자, 그리고 방관자의 구분을 통해 이것이 구조의 순간이 아니라 엇갈림의 찰나임을 알아챘다. 그리고 비탄에 빠진 노인에게서 단테를 연상해 냈다. 캔버스 이면에 담겼을 맥락을 추론하는 이러한 작업은 가시적으로 주어진 정보에만 의존할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은들, 그것들을 타당하고도 그럴싸하게 엮어내는 ‘눈’이 없다면 그 많은 지식들도 무용지물, 아니 오히려 작품 감상에 훼방꾼이 되거나, 그림에 대해 젠체하는 스노브들의 허세에 일조할 뿐이다. 주어진 정보와 작품 사이의 간극을 읽어내는 힘, 산만하게 흩어진 정보들을 하나의 그물로 꿰어낼 수 있는 능력, 어쩌면 기존의 지식 따위는 과감하게 걷어찰 수 있는 배짱..., 감상자들이 작품에 바짝 다가설 때 작가의 품을 떠난 작품들은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화가들을 배반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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