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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Oct 31. 2020

기억의 확대 '여우난곬족'

시시한 이야기 ⑥ 백석, ‘여우난곬족’

평북 방언의, 귀신 씻나락 까먹는 듯한 시어 가득일지라도, 백석의 진면목은 유년시절을 담은 초기작들에 있다고 본다. 처음 읽을 땐 정신이 혼미해지는 부작용도 있지만 뭣도 모르고 읊조리다 보면 언어의 유산이라는 게 뭔지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사랑해요 백석~~)     


명절날이 되면 어린 화자는 엄마, 아버지를 따라, 강아지는 화자를 따라 큰집에 갔었드랬다. 첫 행을 읽으면 동화 같은 그림이 연상된다. 아마도 가족 중 베프로 지냈을 화자를 따라가는 강아지, 화자, 엄마, 아빠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명절날이니 아마도 친가 쪽 친척들이 총출동했을 것이다. 일단 명시된 고모가 셋, 삼촌, 숙모, 사촌 형제 여덟. 그런데 이들 등장인물에 대한 시인의 묘사 디테일이 명품이다.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고 말할 때마다 눈을 깜빡거리는 신리 고모, 하루에 베 한 필을 짜는 그녀는 복숭아나무가 많은 동네에 산다. 살짝 다혈질에 얼굴빛이 까무잡잡한 토산 고모는 나이 열여섯에 마흔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되었다. 산 넘어 해변에 사는 큰골 고모는 과부인데, 늘 흰 옷을 정갈하게 입고 코끝이 빨갛다. 과부의 삶이 고단한지 말끝마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곤 한다. 하나 있는 삼촌은 배나무 접붙이기의 명수지만 술만 마시면 토방돌을 뽑곤 하는 요상한 주사가 있다. 종종 먼섬에 오리 사냥을 가는 그는 밴댕이젓 담그기를 좋아한다. 이밖에 사촌 누이, 동생들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방에 그득히 모여 앉아 있노라면 새옷 냄새, 온갖 떡 냄새, 나물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애들은 애들끼리 모여 마당에서 쥐잡이 놀이, 숨바꼭질, 꼬리잡기, 가마타기, 말타기 등을 하고, 아낙들은 저희끼리 모여 밤새 수다를 떤다... 밤이 되어도 아이들은 잠 잘 생각은 1도 없이 방에 모여 공기놀이부터 온갖 놀이를 하며 신나게 논다. 그러는 동안 짧아진 등잔 심지는 몇 번이나 돋우어지고, 새벽닭이 여러 번 울 때쯤에야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아랫목 싸움을 벌이며 시시덕거리다 잠이 든다. 아침이 되면 시누이 동서들이 분주히 아침 준비를 하고 부엌 문틈 사이로 국 끓이는 냄새가 풍겨온다.     


백석의 ‘(아마도) 여우가 났다는 골짜기의 가족’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정겹고 친밀한 시골 공동체의 흥성스러운 명절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 괜시리 내 추억마냥 그리워지고 만다. 그리고 그의 디테일한 기억과 묘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유년시절은 대개가 그립고 회귀하고픈 시절이지만 백석의 유년기는 시인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우리 모두의 기억이자 가족사가 되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 고무, 고무 딸 이녀, 작은 이녀

열 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던,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 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 여우난곬족, 사슴,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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