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속세로부터 제껴진 산꽃은 시인의 눈에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시인에게는 ‘저만치’, ‘혼자서’ 핀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속세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널널하게 자란 것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마도 시인이 저만치, 홀로 있는 게다. 혹은 공감지수가 높거나.
그래서 산속에 숨은 듯 홀로 피어난 꽃 한 송이가 애달프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 작은 새 한 마리가 나무들 사이로 지저귄다.
문득 시인은 외로운 산꽃에게 동무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오지랖)
꽃이 좋아 산에 사는 아주 기특한 친구라고...
하지만 시인은 깜빡했다. 사시사철 피어났던 꽃은 사시사철 지기도 한다는 것을.
산꽃에 이입된 시인은 절망스럽다.
꽃이 좋다던 산새를 뒤로 하고 떠날 것들은 떠난다.
소월의 산꽃은 외로이 피어났다가 또다시 고독하게 떠나간다.
짤막하고 단조로운, 어쩌면 너무 쉬운 언어들로 된 소월의 시들은 천천히 곱씹을수록 정감의 깊이를 더해간다. 아마도 그래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지도.
소월의 ‘산유화’를 읽을 때마다 겹쳐 들리는 노래가 있다. 故김광석의 ‘꽃’이다. 소월 시의 ‘꽃이 피네’와 ‘꽃이 지네’의 구절이 반복되는 것이 아마도 작사가 문대현이 소월의 시로부터 영감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헌데, 소월의 시와 광석의 노래에 묘한 차이가 있다.
광석의 노래는 ‘꽃이 지네’로 시작한다.
그리하여 하강과 소멸의 이미지로 시작된 노래는 바로 ‘눈물’과 더해져 대놓고 슬픔을 강조한다. 게다가 산이며 들이며 왼통 지는 꽃이다. 바람만 을씨년스럽게 불어대는 겨울의 ‘이곳’은 황폐함 그 자체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고, 봄은 온다.
봄이 오니 꽃이 핀다. 역시 산과 들 사이로 꽃은 가득가득 피어난다. 뭔가 희망의 싹수가 나타날 것이다.
헌데, 여전히 음유시인은 ‘눈물 같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왜.
‘그대’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 오지 않는 이곳에’ 피어난 ‘꽃’은 시인에게 아무런 흥취를 돋우지 못한다. 아니, 외려 슬픔을 배가시키는 요소다.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하게 피어난 것들은 불행한 자들의 슬픔을 더욱 자극하기 마련이다.
소월의 ‘산유화’가 꽃의 생성에서 소멸로 이어졌다면, 광석의 ‘꽃’은 소멸에서 생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생성은 소멸보다 더 비극적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소월의 생성도 ‘저만치’ ‘홀로’ 외로운 것이었기에 비극은 매한가지다. 다만 소월의 ‘꽃’이 존재 자체의 근원적 한계와 연관되었다면, 광석의 재생된 ‘꽃’은 결코 재생될 수 없는 존재와의 대립이라는 면에서 비극의 결이 갈린다. 어떤 ‘꽃’이 더 슬픈가. 광석의 애절하고 피 끓는 소리가 더해졌으니 후자가 좀 더 유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