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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Oct 24. 2020

자기모멸의 달인, 김수영

시시한 이야기 ③ 김수영, '죄와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행동의 실행에 앞선 충분한 고려, 혹은 무심코 저지른 허물에 대한 기꺼운 죗값을 염두에 두라는 아포리즘이다. 그걸 잘 아는 냥반이 대책도 없이 죄를 짓는다. 사전 시뮬레이션도 없이, 뒤처리 하나 변변히 해낼 깜냥도 안 되면서 말이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다. 시인(화자)은 남들 다 보는 길거리에서 마누라를 때려눕혔다. 손에 들고 있던 우산대로. 앞뒤 맥락이고 뭐고 아내를 팬 폭행 남편이다. 들은 풍월에 따르면 상습적으로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들은 남들 다 보는 데보다는 은밀하고 폐쇄된 공간을 선호한다는데, 그렇다면 화자는 상습적이라기보다는 순간적, 즉흥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건 아닐까. 아니면 꾹꾹 눌렀다가 집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부부싸움을 벌일 만한 심적 여유도 없는 급박한 분노 때문에?

    

손에 들고 있던 우산대는 돌연 폭행의 도구가 되었다. 주먹은 놔두고 왜 하필 우산대로 때렸을까. 신체적 접촉의 폭행과 도구를 사용한 폭행 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발생한다. 생각해 보라. 길거리에서 여자에게 주먹질하는 남자와 우산대를 휘두르는 남자. 후자는 전자에 비해 ‘폭행’의 이미지보다 ‘체벌’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뭐, 나만 그렇게 느낀다고 해 두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행은 폭행이다. 시인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의식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한참 매질을 하는데 옆에서 놀란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문득 정신이 든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어느덧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술 취한 이들이 잔뜩 몰려들어 폭행의 현장을 구경하고 섰다.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모른다. 흥분이 좀 가라앉는가 싶더니 비로소 좀 전의 일들이 반추되기 시작한다. 마누라를 때렸다. 그것도 길 한복판에서. 근데 맞은 아내의 상태가 염려되기도 전에 길거리에서 나를 알아보는 누군가가 있지 않았나 퍼뜩 염려가 된다. 마누라나 때리고 다니는 못난 놈. 찌질하고 변변찮은 본래의 모습을 지인 누군가에게 들키지나 않았나 걱정이 된다.      


헌데, 그보다 더 걸리는 게 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내를 때리던 그 우산을 거리에 내던지고 온 것이다. 아까운 우산.     


시인이여, 과연 어디까지 작아질 것인가.

모래야, 먼지야... 누가 누가 더 작고 보잘 것 없는가를 두고 다투던 시인은 마침내 최종 승자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시인은 스스로 허물을 헤아려 보았다. 무엇이 부끄럽고 죄스러운가. 아내를 때린 사실? 아내보다 자신의 체면을 걱정했던 옹졸함? 그깟 우산 하나에 연연했던 용렬함? 시인은 자기경멸의 죄목을 하나 더 얹어 죗값을 치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시시()한 형벌은 폭행의 현장에 없던 사람들에게까지 널리널리 알려졌고, 금석의 문(文)이 되어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 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제 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김수영, 죄와 벌,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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