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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Oct 05. 2020

위대한 시집「백록담」

시시한 이야기 ①  정지용, '백록담'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은 위대하다. 학창 시절 국어 쌤들이 입을 모아 예찬해 마지않던 월북 시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은 아니다. 1930년대 한국 시문단의 지평을 새롭게 개척한  ‘모더니즘의 기수’가 남겼다는 세간의 명성 때문도 아니다. 산은 너무나 사랑하지만 등(登)은 지독하게 혐오하는 관계로 개인 평생 토탈 ‘등산’이라는 행위를 회사 신입 시절 상사의 공갈 협박에 못 이겨 오기로 올랐던 도봉산행 이래 실천한 적 없었던 내 몸뚱어리를 내 돈 내 발을 소용해 스스로 한라의 꼭대기에 오르게 하였으니 이만하면 어느 누구와, 무엇과 상관없이 누군가 개인의 역사에 위대하게 기록될 만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탐라의 배꼽쯤에 담긴 물, 백록담을 향해 오르는 시인의 어지러운 시야에 불쑥 들어온 것은 보랏빛의 들꽃들이다. 뻐꾹채꽃. 멀쩡히 서 있던 것들이 허리가 사라지고 모가지가 사라지고 종내엔 얼굴만 삐쭉 내민다. 시인은 산에 오르는 과정을 그렇게 묘사했다. 산 위에서의 바람은 꽤나 차서 8월 제주의 바람은 함경도의 바람과 맞설 정도다. 정말 그럴까. 궁금했던 나는 시인을 따라 8월에 올랐건만... 바람 한 점 없었다. 시적 과장이 심했거나 음력이었거나 기상이변이 없어서였거나. 뭐 대충 셋 중 하나일 것이다. 벌겋게 상기된 나에겐 뻐꾹채꽃도 고개를 내밀어주지 않았다. 반면, 화문처럼 바닥에 붙어 있던 지용의 뻐꾹채들은 날이 어둑해지자 일제히 하늘로 올라 별이 된다. 시인이 풍경해 취해 기진하는 동안 나는 더위를 먹어 기진했다.


세속의 내가 게토레이와 오이, 김밥으로 기력을 회복하는 동안 시인은 암고란이라는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여 살아난다. 하얀 자작나무들 사이로, 죽어서 촉루가 된 자작나무가 어우러져 공존한다. 시인은 여기서 자신의 죽음을 내다본다. 한쪽 모퉁이에는 파란 무덤처럼 웅크린 것들이 보인다. 제주 방언으로 도체비꽃, 산수국이다.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지천으로 널린 제주의 산수국을 보고 이런 절창을 내뱉을 시인이 몇이나 될까.     

산 위에서는 말과 소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말은 말끼리, 소는 소끼리 저희들끼리 다니다가도 망아지가 소를, 송아지가 말을 스스럼없이 따른다. 새끼를 낳다가 놀란 암소는 서귀포로 달아나 버리고 어미를 잃었다는 송아지는 울며 불며 등산객들에게 매달린다. 시인의 연민을 자아낸다. 난초 향기, 새 소리, 시냇물의 자갈 구르는 소리, 바다가 구겨지는 소리...가 시인의 오감을 향해 일제히 달려든다.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갖가지 나물들을 호명하다가 소나기를 맞는다. 하늘에는 무지개가 그려지고 엉덩이에 꽃물이 짓이겨진 채로 묵묵히 백록담을 향한다.


한라의 절정, 백록담. 조촐하고 고요한 수면 위에 푸른 하늘이 비친다. 시인의 다리는 이미 불구가 될 정도로 지쳤다. 한나절을 백록담과 마주한 시인은 이젠 쓸쓸한 느낌만이 남은 가운데 깨다 졸다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자연과 하나가 된다. ‘백록담’에서 화자가 가장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백록담에 얼굴을 비추기는커녕 가까이 내려갈 수조차 없는 요즘, 더군다나 산안개 자욱한 틈으로 화구가 보일 때쯤이면 담수는 웬걸, 척박하게 메말라 지친 옛 분출구와 조우할 뿐이다. 대상포진의 후유증을 안고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나로서는 어쩌면 그 광경으로부터 또다른 나를 확인한 셈이니 어쨌거나 자연과의 혼연일체에 있어선 지용과 통하는 면이 없지는 않았다.


내가 시 한 편으로 한라를 올랐다고 하면 혹자들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혹자들은 매우 하찮게 여기기도 하며, 가까운 지기들은 뭘 그렇게까지? 별나게 여기기도 한다. 반응은 갖가지여도 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는 공히 시시한 것이 된다. 하지만 그 시시한 이야기는 누군가의 위대한 영혼으로부터 파생되었고 또 누군가에겐 시시함을 훌쩍 뛰어넘기도 하는 것이니, 그 시시(詩詩)한 이야기의 쓸모란 아직 섣부르게 판단할 것은 아닌 걸로.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白樺)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白樺)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움매―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솨―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넌출 기어간 흰 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용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 식물을 새기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촐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이겨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정지용, 백록담, 문장사,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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