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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Oct 26. 2020

절창의 보고(寶庫), 「님의 침묵」

시시한 이야기 ④ 한용운, '알 수 없어요'

가을이다.

바람도 일지 않는 공중에 문득 오동잎 하나가 떨어진다. 철이 바뀌니 당연한 일인가. 하지만 무엇이 당연한가. 여름내 가지에 달려 있던 잎들은 왜 불현듯 변화를 일으키는가. 바람도 없는데 말이다. 무언가의 작용이다. 시인은 문득 그 존재성을 깨닫는다. 하지만 아직은 희미한 발자취로 다가올 뿐.


여름 장마가 물러가며 언뜻언뜻 푸른 하늘이 보인다. 먹구름 잔뜩 찌푸린 동안에도 건재하고 있었다니 경이롭다.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향기는 코끝을 거쳐 나무의 이끼로, 오래된 탑의 꼭대기로, 하늘로 번져갈 것이다. 시인에게 향기는 존재가 뿜어낸 입김이다. 졸졸 흐르는 저 작은 시냇물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발원된 것일까. 근원도 모를 방울들이 모여 줄기를 이루고 돌틈 사이로 흘러내려 소리를 내고 있으니, 시인에게 그것은 존재의 노래이다.

    

그러고 보니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잘 들여다보면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차 있었다. 해는 왜 뜨고 지는지, 나뭇잎은 왜 떨어졌다가 또다시 돋아나는지, 물은 왜 흐르는지... 구름이 생기면 비가 내리고, 먹구름이 물러나면 푸른 하늘이 회복된다. 실체 없는 향기는 어디로 어떻게 사라지는 것일까. 시인은 이 모든 작용들이 누군가로부터 비롯됨을 느낀다. 그리하여 오묘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섭리는 곧 누군가의 발자취로, 얼굴로, 입김으로, 노래로 의인화된다.


드디어 ‘알 수 없어요’의 하이라이트다. 시인은 바닷가 저녁놀 앞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파랗던 하늘이 해가 수평선을 넘어가며 온통 붉게 물들었다. 매일 보는 저녁놀이어도 저녁놀은 매일 그 모양이, 색채가 다르다. 다 달라도 매번 아름답다. 저녁놀을 더 보겠다고 의자를 수없이 옮겨갔다는 어린왕자의 일화가 납득이 된다. 이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 현상을 과연 시인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일단 저녁놀은 손과 발을 갖게 되었다. 수평선에 맞닿은 곳은 바다를 밟고 선 저녁놀의 ‘연꽃 같은 발꿈치’, 서쪽 하늘 일대를 물들인 공간은 저녁놀의 ‘옥 같은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연꽃 같은 발꿈치’라니... (만해 당신은 진정 연가의 1인자)

그 다음도 절창이다. 아름다운 저녁놀은 곧 ‘누구의 시(詩)’로 승화된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대적하는 법.     

나뭇잎에서 푸른 하늘로, 향기로, 시냇물로, 종내엔 아름다움의 극치인 저녁놀에까지... 자연의 현상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롭지만 그 메커니즘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낼 재간이 없다. 그러니 시상은 전환된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물리학에서는 불가능한 엔트로피의 역행도 문학에서는 가능해진다. 이미 소진된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니. 다 타고 사라져 버린 게 아니기 때문일까. 타고 ‘남은’ 재는 시인에게 소생의 싹수가 된다. 그리고 그 역설적 발상의 배후에는 문득문득, 언뜻언뜻 그 존재감을 발휘하던 누군가가 있었다. 섭리의 주관이자, 시인에게 절대적 존재로서의 그는 소멸의 상태(타고 남은 재)가 곧 재생(기름)으로 변주되는 시인의 내면에 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소멸과 생성의 무한 반복 속에 있을 시인의 가슴은 누군가의 밤을 지킬 영원한 등불로 남게 되었으며, 누군가 역시 시인을 통해 나뭇잎과 푸른 하늘, 시내, 저녁놀로 무한 소생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선 너무나 널리 회자되어 이젠 통속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의 시구(詩句)들은 시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그 참신한 표현의 묘미를 음미해 보기도 전에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이라는 도식적 귀결에 잠식되어 시적 언어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그의 독립투사라는 위상이 조금만 덜 강조되었더라면.

승려라는 사실은 애저녁에 필요하지도 않았었다.

그의 ‘님’이 누구인가에 연연하지 않았어도. (‘기룬 것’은 다 ‘님’이라 하지 않았던가.)

만해의 유일무이한 시집 「님의 침묵」 속 88편의 유려한 언어의 배열들은 보다 온당하게 읽혀져야 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종종 희화적으로 인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던 한 이 짧은 시구는 곱씹을수록 절창이다.

아니, ‘님의 침묵’ 의 전 구절이, 아니, 시집 「님의 침묵」은 절창의 보고(寶庫) 그 자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님의 침묵,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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