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진 운동화 밑창
어릴 때 엄마가 항상 말씀하셨다. 엄마친구 딸은 깨우지 않아도 새벽에 일어나 볼펜을 다 쓸 때까지 공부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진짜 새 볼펜의 잉크를 끝까지 다 썼다는 뜻인줄 알았다. 중학교 때쯤인 것 같은데, 그 말 그대로를 믿은 걸로 봐서 나는 영 똑똑한 아이는 아니었나 보다. 어느 날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느라 억지로 책상에 앉아 공책에 볼펜으로 끄적이고 있었는데, 볼펜이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탁! 탁! 쳐도 볼펜이 나오지 않아, 뚜껑을 열고 볼펜 안을 들여다봤더니 웬일인가! 내 볼펜심의 잉크가 바닥나 있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후 엄마에게 자랑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은 엄마에게 자랑을 했다가 핀찬만 들어서 그 기억만 부분 편집되었을 수도 있다. 공부를 한다고 다 쓴 잉크가 아닐 텐데 나는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최근 몇개월은 몇 가지를 꾸준히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조깅이다. 빨리 뛰거나 많이 뛰지는 못하지만 주말도 빠지지 않고 매일 뛰고 있다. 주말을 건너뛰어 봤더니 조깅을 완전 놓아버려 그냥 매일 뛰기로 했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며 조깅을 하던 중 오늘 운동화가 땅에 쩍쩍 달라붙어 껌이라도 붙었나, 개똥이라도 밟았나 하고 신발을 뒤집어 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운동화 밑창이 떨어진 게 아닌가! 내가 조깅을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밑창이 다 떨어진단 말인가! 요즘 운동화가 얼마나 튼튼하게 나오는데 밑창이 다 떨어질 정도로 뛰었단 말인가! 신발을 아주 오래 신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고 신발 밑창이 떨어진 경험은 처음이다. 분명한 건 내가 뛰어서 신발 밑창이 떨어진 게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자랑스러운 영광의 증표이다. 볼펜의 기억처럼 억지스럽지만 마냥 뿌듯하다. 뛰어서 떨어졌건, 하자제품이건 관계없이 이 떨어진 밑창의 기억은 내일도 나를 계속 뛰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