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부부끼리 여행 가도 안 싸울 수 있다.(P&J)

꿈을 찾아 나선 평범한 부부의 이야기[태국 한 달 살기]

by LouisLee

23년 10월 퇴사 후 세계여행을 가겠노라고 주변 지인들에게 말했다. 소식을 들은 지인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부럽다.

나도 해보고 싶다.

어디 어디 갈 계획이냐?

언제 다시 돌아올 계획이냐?

등등...


와중에 결혼한 지인들이 공통적으로 던지는 질문도 있었다.


아내랑 같이 가도 괜찮겠어?


호기롭게 당연히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내심 걱정이 아예 없진 않았다. 7년 반의 연애기간 동안 위기도 있었고 결혼생활 10년 차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다툼도 있었지만 모두 극복해 왔다. 국내·외 여행도 수차례 함께 다녔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단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서로의 생활습관도 이해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상대방을 배려하며 지내왔고 취향도 비슷해졌다.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다시 지인들이 꼬리 질문을 던진다. 나와 아내의 MBTI 성향 중 J와 P가 서로 상충하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J, 즉 여행을 가기 전에 촘촘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맞춰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다. 동선이 꼬이거나 방문하기로 한 장소가 휴무일이면 이후 일정이 모두 어긋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도 나 자신이 피곤한 성향이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나의 타고난 기질이다. 반면에 아내는 P, 즉 여행을 가더라도 나름 계획을 세우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불완전하며 비효율적이다. 그리고 계획을 굳이 따르지 않아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성향이다. 식사 시간이 길어져도, 동선이 꼬여도 괜찮다. 그것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나도 아내도 틀린 사람은 없다. 서로가 다를 뿐이다.




결혼 전 혼자 유럽여행을 갔을 때가 생각났다. 매일의 스케줄을 분 단위로 계획했었다. 여행을 가기 전까지는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 효율적이고 완벽한 일정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일정대로 되지 않았다. 동선이 꼬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여행을 즐기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맛을 음미하기보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데만 신경이 매몰되어 있었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다가올 미래를 불안해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몇 년이 흐른 후 나에게는 유명 관광지 몇 군데를 방문했다는 기억만 있을 뿐 그곳에서의 감상이 어떠했는지 그래서 뭐가 좋았는지와 같은 추억이 남지 않았다.


그러다 아내를 만나 함께 여행을 갔다. 처음에는 투닥거림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선이 비효율적이었다. 애써 세운 계획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나는 나대로 계획이 변경되어 힘들었고 아내는 아내대로 나의 눈치를 보느라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음 편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몇 번의 언쟁 끝에 하루 씩 번갈아 가며 각자의 여행 스타일에 맞춰 상대방이 군말 없이 따라주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마음을 비우고 상대적으로 느슨한 아내의 여행 일정을 소화했다. 그날의 경험이 나에게는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이동을 하는 와중에 계획에 없던 상점을 방문하거나 간식을 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식사를 하면서 오롯이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관광지에서는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동 동선이 꼬여도 아무 문제없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오히려 빈틈없이 분 단위로 계획한 것보다 더 다양한 것들을 보고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진정한 여행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고 여유 있는 여행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번에 태국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도 여유롭게 일정을 짰다. 오전과 오후에 소화할 각각 한 가지의 계획만 세웠다. 푸켓에 머물던 어느 오후 빅 붓다(Big Buddha)로 유명한 프라 풋타 밍몽콘(Phra Phut Tha Ming Mong Khol) 사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사원 정상에 있는 초대형 불상도 관람하고 푸켓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고 하여 택시를 탔다. 당연히 이후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여유롭게 구경하고 사진도 찍었다. 불상의 압도적인 크기도 장관이었지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인근 해변의 경치도 빼어났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슬슬 내려갈 채비를 하던 찰나 아내는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까론 해변(Karon Beach)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해변이 워낙 아름답기도 했고 이후 일정도 없었기 때문에 그러기로 했다. 순간적으로 해변까지 가는 이동 방법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오후 2시 정도 됐을 때라 태양은 아직 뜨거웠고 택시를 타고 올라왔던 산길은 경사가 가팔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원으로 올라가는 찻길은 해변의 반대쪽으로 나있었다. 얼핏 가늠해 보았을 때 찻길을 따라 도보로 이동하면 약 3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당연히 차를 타고 이동해야겠다는 계획을 마음속으로 세우고 스마트폰에서 택시 예약 어플을 누르려던 찰나 다시 아내가 얘기했다. 걸어서 가고 싶다고 한다.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손가락을 옮겨와 지도 어플을 열었다. 검색해 보니 다행히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가 있었다. 산 정상에서 곧바로 카론 해변으로 향하는 약 1시간 거리의 코스였다.

사원에서 해변으로 가는 차량 경로(왼쪽)와 도보 경로(오른쪽)

예전 같았으면 마음속으로 세운 계획을 그대로 관철시키기 위해 뜨거운 햇빛, 가파른 하산길, 모기와의 사투 등을 이유로 택시를 타는 것이 효율적이라며 아내를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예전부터 쪼리를 신고도 어지간한 산은 탈 수 있다고 아내에게 자랑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신은 쪼리로는 가파른 산길이 위험하다'는 궤변도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군말 없이 아내의 제안을 따랐다. 지도 어플이 안내하는 경로를 따라 까론 해변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밧줄을 잡고 내려와야 할 정도로 경사가 심했다.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멈추면 금세 모기들이 달려들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정글을 탐험하는 느낌도 났고 쪼리를 신고도 이 정도 길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으스댈 수 있었다.



약 1시간을 걸어 해변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길만 건너면 목적지였다. 내가 세웠던 마음속 계획은 모래사장으로 가서 음료를 사 들고 그늘을 찾아 앉아서 쉬는 것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적절한 때를 재고 있을 무렵 갑자기 아내가 저기에서 과일 주스를 사서 들고 가자고 했다. 아내가 가리키는 곳은 길을 건너기 직전 횡단보도 옆에 있는 과일 가게였다. 또다시 나의 계획에 간섭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모래사장에 있는 과일 주스 상점들은 단지 바다에 더 가깝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길 건너 가게들보다 높은 값을 받는다.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순간 되살아났다. 아내 덕분에 더 저렴한 값에 신선한 과일 주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내의 즉흥적 제안들 덕분에 계획에 없던 새로운 경로도 걸어 볼 수 있었고 예산도 아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획을 고집했더라면 만들지 못했을 특별한 추억이 생겼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여행을 다니며 쌓은 우리 부부의 잊지 못할 추억들은 대부분 아내의 예상치 못한 제안들 덕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획을 세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기질이 발현되는 것을 아예 차단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타의에 의해 계획이 수정될 때 이전보다 유연한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그로 인해 이번 여행 기간 내내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준 아내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사진 출처 @the_kang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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