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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Apr 07. 2024

15년 동안 간직했던 꿈

프롤로그

2023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5년째 잘 다니던 직장을 제 발로 걸어 나왔다. 퇴사를 어느 정도 마음먹고 통보하기까지 4일이라는 시간 동안 아내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도 상의를 거치않았다. 주변 누구에게 말해본 들 같은 반응이 예상되었다.


"정년까지 보장된 안정적인 직장을 왜 그만둬?"

"너도 이제 마흔인데 앞으로 뭐 먹고살려고 그래?"

"남은 대출금액은 어떻게 갚으려고?"

"다른 회사 가면 뭐 다른 줄 알아? 다 똑같아~"


반박할 주장과 근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입 아프게 대답해 봐야 시간과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 대로 살고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다.


마침 아내도 다음 달이면 무직 상태가 된다. 둘 다 몇 년간 일에 치여 살았다. 복잡하게 꼬인 머리와 꽉 막힌 마음에 휴식이 필요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가져야했다. 그러다 아내가 순례길을 걷고 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나는 15년 전 대학생 시절 순례길의 일부를 걸은 경험이 있다. Santiago de Compostela(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이하 산티아고)에서 Fisterra(피스떼라)까지 약 100km의 거리를 3일 동안 걸었다. 비록 짧은 경험이었지만 길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과 추억들이 아직도 문득 생각나곤 한다. 


산티아고를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부는 고원 지대를 몇 시간 동안 걷다 드디어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비로소 맞이한 대서양을 보며 감격에 빠졌던 순간이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겨우 3일 걷고 바다를 본 게 뭐 그리 대수냐고 반문한다면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만큼 힘들었을 수도 있고 감성이 풍만하던 시기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잊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던 것은 확실하다. 그때의 순간이 너무 아름답다 느껴져 당시 여자친구(현재의 아내)에게 나중에 꼭 같이 걷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이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접할 때면 잊고 있던 예전의 추억이 되살아나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에게 함께 제대로 완주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넌지시 흘렸었다. 심지어 신혼여행을 순례길 걷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냐는 농담 섞인 제안도 했었다. 평소 운동을 즐기지 않아 근력과 체력이 약한 아내는 매번 시큰둥했다. 굳이 자처해서 고행을 떠나는 이들이 도무지 이해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일 때면 나의 소망이 점점 요원해진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 아내 입에서 먼저 순례길 얘기가 나오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단번에 좋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Camino de Santiago(까미노 데 산띠아고, 산티아고 순례길)를 걷기로 결정했다.





나는 곧바로 준비에 착수했다.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도서관에 가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여행기와 가이드북들을 모두 섭렵했다. 경로는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프랑스 길을 택했다. 순례자들을 위한 방향 안내 표지, 식당 그리고 숙소 등의 인프라가 가장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행군이 처음인 아내를 생각했을 때 최선의 선택지였다. 최근에 순례길을 다녀온 블로거와 유튜버들의 여행기도 수 없이 검색해 보았다. 짐은 어떻게 꾸릴지, 옷차림과 신발은 뭐가 좋을지, 기온이 너무 덥지는 않은지, 경비는 얼마가 들었는지 등등 참고할만한 정보들을 모두 정리해 두었다. 15년 전 짧은 순례길을 걸었을 때 적어두었던 일기도 오랜만에 꺼내어 읽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다. 그래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예행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새로 산 트래킹화를 길들여야 하고 스틱 사용법도 손에 익혀야 했다. 쓸데없는 짐을 가방에 넣지 않았는지, 반대로 추가할 물건이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그런 우리에게 제주 올레길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제주 올레길에서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6일간 약 85km를 걸은 올레길에서의 예행연습은 성공적이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많이 잡혔는데 이를 방지하려면 신발끈을 느슨하게 묶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백팩이 높아서 등산용 챙모자를 쓰면 고개를 들 때마다 모자의 뒤쪽과 백팩이 닿으면서 거슬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때문에 뒤쪽은 천으로 된 햇빛 가리개가 있고 앞과 양옆에만 챙이 있는 모자를 구입했다. 15년 전 순례길에서 신었던 샌들의 끈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새 제품을 장만했다. 미리 신어보지 않고 그대로 스페인에 들고 갔으면 적잖이 난감했을 것이다. 아내도 몇 가지 짐들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육체적·물리적 준비 까지도 모두 마쳤다.


이제는 정말 순례길을 걷는 일만 남았다.


추석 연휴 기간 동안 가족들의 응원을 받고서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둘러 복귀해야 할 직장이 없는 관계로 싱가포르 - 런던(영국) - 비아리츠(프랑스)를 들르는 여유로운 일정을 소화하며 자연스레 시차 적응까지 마쳤다.


그리고 2023년 10월 9일. 이틀 뒤면 드디어 15년 전부터 아내와 순례길을 함께 걷고 싶다는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들이 내걸었던 카드 섹션 문구 '꿈★은 이루어진다'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설레고 기대된다. 어떤 멋진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스페인의 시골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완주를 하고 났을 때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막막함을 걷어내고 발견한 정답이 과연 무엇일지가 나의 심장을 가장 두근거리게 했다. 부상이나 중도 포기 등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아프고 힘들 땐 잠시 쉬면 된다. 아내와 나는 오랜 기간 알고 지낸 만큼 서로에게 버팀목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순례길을 완주하고 나면 확실한 인생의 정답을 찾았겠지?


내일은 프랑스길의 출발지인 Saint Jean Pied de Port(생장 피에 드 포흐, 이하 생장)으로 간다.


가자. 

가서 걸어보자.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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