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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Apr 09. 2024

걱정과 설렘 사이

0일 차 : 비아리츠에서 생장까지

2023.10.10. 화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0일 차


Biarittz 비아리츠 ~ Saint Jean Pied de Port 생장 피에 드 포흐



프랑스인들에게는 휴양지로 유명한 바닷가 마을 비아리츠를 둘러보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면 최소 한 달은 바다를 볼 수 없기도 하고 일찍 연 카페가 있으면 아침이라도 챙겨 먹을 심산이었다. 해변을 향해 걸어가다 작은 재래시장을 발견했다. 시장 입구 쪽 카페에서 간단한 음식들로 배를 채우는 동안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비아리츠의 해변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단순히 바닷가 절경 때문만이 아니었다. 상쾌한 아침 공기, 청록색의 잔잔한 바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가벼운 눈인사까지 기분 좋게 해주는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덕분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의 포근한 햇살을 받으며 수려한 기암괴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만약 3개월 전 퇴사를 결정하지 않고 이전과 다름없이 평범한 직장인으로 계속 살고 있었더라면 아내와 이 순간 이 장소에 오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행복한 감정 역시 평생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벅차오르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아직 순례길을 걷지 않았지만 걷기로 결심하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미 잘 한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와 호스트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가 순례길을 걸을 예정임을 알려주자 무사히 완주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겠다고 했다. 가슴이 따듯해졌다.


순례길의 출발지인 Saint Jean Pied de Port(생장 피에 드 포흐, 이하 생장)까지 가기 위해서는 Bayonne(바욘)에서 기차 또는 버스를 타야 한다. 마침 숙소 근처 정류장에 바욘행 버스가 있었고 정류장 도착 후 얼마 되지 않아 버스가 오는 바람에 곧장 탑승할 수 있었다.

Biarittz → Bayonne → Saint Jean Pied de Port


1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바욘역은 기차역이기도 하지만 버스 터미널이기도 했다. 역 앞 광장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는데 생장행 버스에 오르는 순례객들이 보였다. 우리도 다음 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며 여유롭게 햇살까지 즐기고서 느긋하게 매표소 직원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오늘 생장으로 향하는 교통편은 5시간 뒤에 떠나는 기차 1대밖에 없단다. 당황스러웠다. 생장에 일찍 도착해서 여유를 즐기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


비아리츠에서 좀 더 서둘렀으면... 바욘에 도착 후 간식을 먹기 전에 매표소부터 들렀더라면...

그랬으면 조금 전 순례객들이 오르던 버스에 나도 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깊은 후회와 자책의 감정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하나 이번엔 다행히 금방 정신을 추슬렀다. 계획대로 모든 일이 흘러가지 않는 것에 이전보다 관대해졌나 보다나이가 들어서 인지 퇴사를 하고서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심리적으로 건강해졌다는 점이다.




검색해 보니 이곳 바욘도 산티아고로 향하는 여러 순례길 중 하나의 시작 지점이라고 한다. 당연히 albergue(알베르게, 순례자 전용 숙소)가 있고 그곳에서 credencial(끄레덴시알, 순례자 전용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고 한다. 어차피 필요했는데 생장에서의 그것과 동일한 종류·가격이라고 하니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역에서 도보로 약 15분 거리의 알베르게를 찾아갔으나 잠겨 있었다. 좀 더 찾아보니 14시에 문을 연단다. 감사하게도 입구 옆에 의자가 있어 앉아서 기다렸다.



얼마 후 직원이 14시에 딱 맞춰 출근해서 문을 열고 우리를 안으로 안내해 줬다. 끄레덴시알을 구매하고 직원과 짧은 대화를 마친 후 늦은 점심 식사를 위해 주변 식당을 찾았다. 브레이크 타임 직전이라 식당 내부에는 앉을 수 없지만 길가 테이블은 이용 가능하다고 했다. 친절한 응대와 맛있는 음식이 인상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바욘역으로 돌아가 기차를 기다렸다. 열차 시간에 가까워지자 슬슬 백팩을 멘 순례객들이 역사 내부를 채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탈 기차가 접근한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기차 내부에는 더 많은 순례객들이 들어차 있었다. 마침 운 좋게 빈자리가 있어 편히 앉아 갈 수 있었다.


그런데 5분 만에 의자에 앉은 것은 결코 행운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옆자리 영국인 여성과 호주인 남성이 상당히 시끄러웠다. 특히 영국 여성분이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의도치 않게 들은 내용에 의하면 둘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이고(그럼에도 어쩜 그렇게 쉬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생장에서부터 순례길에 오르기 위해 이 기차를 탔다고 한다. 가는 동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려 했는데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결국 소음을 견디지 못해 다른 좌석으로 피신했다. 나는 묵묵히 견디다 오른쪽 귀에서 출혈이 발생하기 직전 목적지에 도착한 덕에 도망치듯 기차에서 탈출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여러 순례길 중 가장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 프랑스길은 이곳 생장에서부터 시작된다. 끄레덴시알 발급과 순례객들에게 간단한 안내를 해주는 순례자 사무실이 있고 알베르게들도 밀집되어 있다. 골목의 가장 위쪽에 있는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부부 한 쌍 그리고 말레이시아에서 온 두 사람과 함께 6인실 도미토리를 쓰게 되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마을을 구경하러 나갔다.


숙소 바로 앞에 옛 성터가 있어 올랐다. 내일부터 우리가 걸을 서쪽 방향을 바라보자 저 멀리 Pyrenees(피레네 산맥)가 보였다. 조금 전 순례자 사무실에서 들은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피레네 산맥을 건너는 첫날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다고 했다. 산맥을 직접 마주하자 걱정이 되었지만 그 아래 펼쳐진 평화롭고 이국적인 경관 덕에 이내 기분 좋은 긴장감과 설렘이 피어났다. 


'드디어 15년 동안 간직했던 나의 소망을 이루게 된다니.'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생장에 와 있는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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