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차 :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2023.10.11 수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1일 차
25.07km / 9시간 56분 / 날씨 좋음
새벽부터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귀가 밝은 편이라 집이 아닌 곳에서 잘 때는 항상 귀마개를 끼고 자는데도 소용없었다. 시계를 보니 5시였다. 같은 객실의 말레이시아 순례객들이 헤드랜턴에 의지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어차피 6시에 일어날 예정이었다. 결국 나도 5시 반에 침낭을 빠져나왔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간단한 식빵 토스트로 아침을 먹었다. 배가 고프거나 맛있어서가 아니라 일정을 버텨내기 위한 열량을 채우는 과정에 가까웠다. 이래저래 준비를 마치고 7시쯤 숙소를 나섰다. 밖은 아직 깜깜했다. 가로등이 거의 없어 순례길 안내 표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핸드폰 어플 덕분에 길을 헤매지는 않았다.
한 시간가량 지나자 서서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시골은 참 아름다웠다. 높고 맑은 하늘 아래 푸른 잔디가 깔려 있고 그 위에 가축들이 자유로이 방목되어 거니는 풍경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바람이 조금 세긴 했지만 덕분에 땀이 금세 말랐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중간중간 bar(바르, 카페·식당·술집을 겸하는 음식점)와 길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산맥을 거의 넘기 직전에 푸드 트럭이 있어 잠시 들렀는데 우리가 바나나, 초코바 등 간식을 구매하자마자 주인은 마감 정리를 했다. 연이어 많은 순례객들이 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코스는 듣던 대로 쉽지 않았다. 피레네 산맥을 넘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을 5시간가량 걸었다. 마지막 고개를 넘을 때는 숨이 꽤나 찼다.
내리막이 시작될 즈음 갈림길이 나왔다. 다소 가파르지만 짧은 경로가 있고 조금 돌아가지만 경사가 완만하면서 경치가 좋은 우회로가 있었다. 우리는 경치가 좋은 우회로를 택하기로 협의했다. 그런데 내가 길 안내 표지판을 놓치는 바람에 잘못된 경로에 들어섰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되돌아가기에 너무 멀리 와버린 상태였다. 아내와 짧은 언쟁이 있었지만 이내 화해하고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우여곡절 끝에 약 10시간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올레길을 걸으며 연습한 것이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체력과 근력이 향상되었음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둘 다 발에 물집이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 올레길을 걸은 첫날부터 물집 때문에 고생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는 내부가 깔끔하고 시설도 좋은데 가격까지 저렴했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으나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주변에 상점이 없어 숙소 1층 자판기에서 땅콩과 맥주를 뽑아 요기했다. 역시 힘든 노동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는 기가 막혔다. 그런데 몇 모금 마시다 보니 어째 맛이 좀 밍밍하다 느껴졌다. 다시 보니 무알콜 맥주였다. 원효대사 해골물을 스페인에서 경험하다니. 아내와 한참을 웃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향했다. Menu del dia*(메누 델 디아, 오늘의 코스 요리)를 먹었다. 수프, 파스타, 닭다리, 생선 구이 그리고 와인을 12€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었다. 원형 테이블에 5개국 출신의 순례객 7명**이 모여 앉아 음식을 먹으며 오늘 하루에 대한 후기를 공유했다. 다들 들떠있었다. 우리도 아직까지 컨디션이 좋다.
* 전채, 본식, 디저트, 빵, 음료(물 또는 와인)로 구성된 식사. 지역과 식당에 따라 코스 별 선택지가 다르다. 나는 주로 샐러드, 돼지고기 구이, 초콜릿 케잌 그리고 와인을 주문했다.
** 룩셈부르크에서 2명, 미국 보스턴, 호주, 중국 위구르에서 각 1명 그리고 우리 부부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밖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았다. 다른 순례객들을 보니 옷가지들을 침대 난간에 널어놓았다. 사생활 보호용 커튼도 칠 겸 우리도 난간에 덜 마른 빨래를 걸고 포근한 침낭으로 들어갔다. 가장 힘들다고 하는 첫날을 무사히 마쳤으니 내일은 오늘 보다 수월하길 바라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