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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May 11. 2024

가랑비에 온몸이 다 젖는다.

16일 차 : 까스뜨로헤리스에서 보아디야 델 까미노까지

2023.10.26 목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16일 차


Castrojeriz 까스뜨로헤리스 ~ Boadilla del Camino 보아디야 델 까미노

20.33km / 6시간 01분 / 흐림, 바람, 비




8시에 출발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바람이 강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전체적인 경로는 초반에 넘은 언덕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탄했다. 언덕 정상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광경을 잠시 감상하고 발길을 옮겼다.



2시간가량 걷자 작은 성당 겸 알베르게가 나왔다. 기부금을 내고 차와 쿠키를 먹었다. 오늘 Castrojeriz(까스뜨로헤리스)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에게는 첫 번째 휴식 장소인지라 사람들로 북적였다. 룩셈부르크 출신 폴도 있었다. 그저께 Burgos(부르고스)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감기 기운과 발목 통증을 안고 있었는데 많이 호전되었단다. 다행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폴은 먼저 출발한 상태였다. 우리도 채비를 갖추고 발길을 재촉했다. 저 멀리 폴이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이정표에 따르면 직진을 하라고 되어 있는데 폴은 왼쪽으로 빠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쫓아가서 알려주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이름을 크게 불렀다. 못 들으면 가방을 내려놓고 뛰어가서라도 불러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폴은 다행히 한 번에 내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손짓으로 그 길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폴도 이해했다는 제스처를 취하고서 몸을 돌렸다. 부르고스에서도 방향을 잃고 헤매더니 오늘 또 그러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 걱정도 된다.


분명 이정표는 직진해서 다리를 건너라고 하는데 폴은 엉뚱한 길로 빠져 걸어갔다.




어제저녁과 오늘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은 덕에 걷는 내내 힘에 부치거나 허기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적어도 12시 전 까지는 그랬다. 정오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강한 역풍과 더해져 빗방울이 지면과 수평 방향으로 날아왔다.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도 얼굴이 따갑고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깊게 눌러쓴 모자챙 아래로 간신히 보이는 한두 걸음 앞 땅바닥만 응시한 채 걸었다.


다행히 강수량이 많지 않아 우비를 꺼내 입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최근 며칠 하도 비가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금방 그칠 거라 기대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상의 바람막이와 반바지가 어느 정도 방수 역할을 해줬다. 그런데 한 시간가량 지나자 어느새 온몸의 전면부가 다 젖어있었다. 양말을 타고 빗물이 신발 안으로 들어가면서 발목과 뒤꿈치를 시작으로 서서히 축축해지고 있었다. 그 라도 우비를 꺼내 입었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았다. 비바람을 막아 줄 곳 하나 없는 길 한복판에 멈춰서 가방을 내려놓고 우비를 착용하는 동안 오히려 더 젖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다 젖어버려서 뒤늦게 조치를 취한들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포기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물에 젖은 생쥐 꼴로 한 시간을 더 걸었다. 속옷은 물론이고 신발 안쪽까지 흥건했다.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첨벙 거렸다. 정신적으로도 훨씬 빠르게 지쳐갔다. 옷과 신발을 다 말려야 내일 다시 온전한 컨디션으로 걸을 수 있다는 근심 역시 마음을 괴롭혔다.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 당초 목적지 Fromista(프로미스따) 보다 6km 가까운 Boadilla del Camino(보아디야 델 까미노)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원래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프로미스따로 갈 계획이었다. 우리 둘 다 상당히 지치기도 했고 날이 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프로미스따에는 알베르게 2개가 있는데 먼저 도착한 장O님과 시O님에 따르면 둘 다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상의 끝에 오늘은 그냥 여기서 묵기로 했다.


이것도 나름 추억이라며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 찍은 사진. 어긋난 수평과 렌즈에 묻은 물방울에서 급박함이 느껴진다.


숙박비는 12€로 사립 알베르게치고 비싸지 않다. 점심을 먹는 동안 우릴 응대한 직원들도 상당히 친절했다. 공용거실에는 난로도 있다. 비에 발이 묶여 프로미스따까지 가지 못한 순례자들이 이곳에 머물기 위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다들 난로 앞에 앉아 젖은 옷가지들을 말렸다.


어딜 가나 그러하듯 이 숙소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치명적인 단점 1.5개가 있다. 한 가지는 핸드폰 신호뿐 아니라 와이파이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불멍을 때리며 다른 순례객들과 오늘의 사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며 시간을 보냈다. 다른 단점은 샤워장에 온수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아 0.5개짜리 결함에 해당한다. 평소 한국에서도 찬물 샤워를 즐겨하는지라 물이 잘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비, 바람 그리고 추위를 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마을에 식료품점이 없어 알베르게 바로 옆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알베르게와 호텔의 주인은 같은 사람인 듯했다. 비용을 더 지불하더라도 깨끗하고 시설 좋은 곳에서 사생활을 보호받으며 묵기를 선호하는 순례자들은 호텔에 체크인 했다. 아무래도 이용객의 연령층은 비교적 높은 편이다.


호텔 투숙객과 알베르게 투숙객들이 한데 어우러져 식사를 했다. 음식은 나쁘지 않았다. 와인도 테이블당 한 병씩 줬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술을 먹지 않아 우리가 가져다 먹었다. 저녁이 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숙소로 돌아가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다른 순례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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