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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May 10. 2024

순례자의 최대 고민거리 4개

15일 차 :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에서 까스뜨로헤리스까지

2023.10.25 수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15일 차


Hornillos del Camino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 Castrojeriz 까스뜨로헤리스

20.13km / 6시간 32분 / 흐림, 바람




평소 아침거리를 전날 사놓는 편인데 마을에 식료품점이 없었다. 대신 숙소 옆에 일찍부터 문을 열고 순례자들에게 조식을 제공하는 식당이 있다고 하여 들러서 조식을 해결할 예정이었다. 허나 7시부터 영업한다는 지도 어플의 설명과는 다르게 가게 내부는 어두웠고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앞이 캄캄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마을은 11.8km 떨어져 있었다. 공복 상태로 3시간을 걸었다. 어제 늦은 점심 겸 저녁으로 라면을 먹은 후 밤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바로 잤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좀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껏 걸은 날들 중 가장 고되었다. 다행히 미리 쟁여놓았던 땅콩과 초코바 그리고 먹다 남은 와인이 있었다.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1시간도 못 걸었을 것이다. 오늘 여정의 중간 지점인 Hontanas(온따나스)에 이르러서야 영업 중인 식당을 발견했다. 마지막 식사를 한 지 19시간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다.



강풍이 부는 언덕을 지났다. 먼발치에 풍력 발전기가 보이면 일단 불안감이 엄습한다. 분명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아무 곳에나 발전기를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몇 년 간의 데이터가 쌓이고 경제성 분석을 통해 바람이 가장 많이 부는 지점을 신중히 골랐을 것이다. 멀리서 보기에도 거대한 날개가 힘차게 돌고 있기라도 하면 불안은 두려움으로 바뀐다. 그만큼 바람이 세게 불고 있다는 뜻이다. 걷기에는 영 좋지 않은 징조다.


풍력 발전기는 친환경 에너지원 중 가장 핵심이 되는 설비 중 하나다. 평소 자연이 만들어낸 바람의 힘을 전기로 변환시키는 공학 기술의 집약체인 거대한 풍력 발전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는 반대로 얼마나 강한 역풍이 나를 힘들게 할지 짐작케 하는 공포의 상징물이 되어버렸다. 입대 전과 다르게 군대에서는 하얀 눈이 그저 나를 괴롭히는 이쁜 쓰레기로 전락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늘도 망할 놈의 풍력 발전기는 최대 효율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어쩐지 바람이 거세게 불더라.





도착 마을인 Castrojeriz(까스뜨로헤리스)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라면, 김밥 그리고 소주를 판다고 하여 기대에 부풀어 열심히 걸었다. 아쉽게도 소주는 어제 재고가 떨어졌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계란 프라이가 올라간 짜장라면과 김밥 한 줄에 와인을 곁들였다.


며칠 전부터 인사를 나눈 한국인 시O님과 장O님도 5분 간격으로 식당에 들어왔다. 같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 라면을 먹다 이구동성으로 다들 한식이 너무 그립다고 했다. 1주일 뒤면 Leon(레온)이라는 제법 큰 도시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에어 비앤비(공용숙소)를 구해 다 같이 한식·삼겹살 파티를 하면 어떠냐는 말이 나왔다. 마침 레온에는 아시아 식료품점도 있다고 했다. 다들 좋다고 호응했다. 다만 나는 내심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한국인이면 으레 던지는 '다음에 밥 한 번 먹자' 수준의 지키지 않을 약속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평소 빈말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탓에 이 자리에서 약속을 확정하고 싶었다. 허나 혹여 한참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주저되었다. 다 같이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 먹으면 즐겁기야 하겠지만 아직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이기도 했다. 며칠 사이 서로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도 있다. 레온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맙게도 두 분 다 빈말이 아니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누군가에 의해 순식간에 단체 채팅방이 개설되면서 7일 뒤 약속에도 무게가 실렸다. 너무 기대된다. 어서 다음 주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트에서 재료들을 구입해 와 알베르게 주방에서 파스타를 요리해 먹었다. 식사 후 스위스에서 온 할아버지, 네덜란드 출신 로버트 그리고 독일 출신 소피와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순례길이 가지고 있는 힘, 목적과 의의 등에 대해 나름 심도 있는 대화들이 오갔다. 저마다 사연이 있어 걷기 시작했고 이곳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인생에 전환점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미 충분한 동기 부여와 영감을 받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순례길에 올라 15일 동안 모두가 행복감을 느낀다는 점만은 동일했다. 특히 걷는 동안 고민해야 할 것이 딱 4개밖에 없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지 않다는 것에 모두가 맞장구를 쳤다.


걷는 것.

먹는 것.

싸는 것.

자는 것.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실제로 그렇다. 아내와 나는 매일 아침 동이 트기 전에 길을 나선다. 이정표만 보며 서쪽을 향해 묵묵히 걷다 뒤를 돌아보면 해가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떠나 온 마을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다 중간중간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한다. 최근 들어서는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고 강한 역풍이 하루 종일 분다. 비는 오다 말다를 반복하는 탓에 우비를 입고 걸어야 할지 접어서 가방에 넣어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식사 시간이 되어 배가 고픈데 마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막상 근거리에 식당이 있어도 영업시간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을 안고 일단 들어가서 물어봐야 한다. 오늘은 다행히 한 번에 시에스따가 없는 식당을 찾았다. 어깨는 날이 갈수록 아파온다. 아무래도 뱃살이 빠지면서 배낭의 허리끈이 느슨해졌나 보다. 가방의 무게가 허리에도 분산될 수 있게 다시 꽉 조이니 좀 낫다. 아내는 불편한 곳 없이 잘 걷고 있는지 늘 노심초사하게 된다. 경로를 벗어나지 않았는지 수시로 지도 어플에서 현재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가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다른 순례자가 내 속도 모르고 자꾸만 두 마디씩 던지기도 한다.


순간순간을 이겨내며 정신없이 걷다 보면 멀게만 느껴졌던 목적지도 어느새 성큼 가까워져 있다. 알베르게에 체크인 후 침대 옆에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샤워실에서 뜨거운 물을 으면 온몸이 나른해지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든다. 저녁식사 전에 잠시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나면 또 금방 정신이 또렷해지고 기운이 되살아 난다.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갖는 소박하고 일상적인 행위가 나를 위로한다. 매일이 보람차다. 이 모든 것들이 다음 날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낭에서 빠져나와 다시 걷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살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신경 쓰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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