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해를 보며 출발했다. 8시면 일출이 시작되는데 오늘은 그 보다 30분 늦게 숙소를 나서기도 했거니와 구름도 거의 없었다.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어 아침부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한식·삼겹살 파티가 계획된 Leon(레온)까지 오늘 포함 3일 남았는데 매일 평균 20km 이하만 가면 된다. 거리에 대한 부담이 적어 발걸음마저 가벼웠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길이 대체로 평탄했고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국도와 나란하게 경로가 뻗어있었다.
Bercianos del Real Camino(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라는 작은 마을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리가 들른 카페에는 최근 며칠 동안 길에서 마주치며 인사를 나눈 다른 순례자들이 먼저 와 있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앉아있는데 한 명이 다가왔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 들은 스페인 출신의 친구 사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동안 우리와 맞닥뜨리며 친해질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나타나 반가움에 말을 걸었단다. 단순히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에 동질감을 넘어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미는 순수함이 느껴졌다. 덕분에 인류애가 충전되었다.
걷는 동안 스페인 시골 마을에서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했다. 대문 앞에 커다란 물통을 세워 놓은 가정집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유를 나름 유추해 보았다.
스페인의 수돗물에는 석회질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는 반면 누군가는 생수를 구매해 먹을 것이다. 생필품은 마을의 작은 식료품점 보다 대형 할인 매장에서 다량으로 구매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다. 갖고 있던 지식들에 스페인 사람들의 느긋한 생활 습관을 조합하자 한 가지 추론이 떠올랐다. 인근 도시의 대형 마트에서 생필품들을 장 보고 집에 돌아온 어느 가족이 생수통 들이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워낙 다양하고 많은 물품들을 구매했다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몇 걸음 더 가자 다른 집 앞에도 물통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집도, 옆옆집 대문에도 있었다. 아무리 이 곳 사람들이 여유가 넘친다 해도 거의 모든 집들이 전부 장 본 물건을 대문 옆에 흘렸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가설이 틀렸나 보다.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순례길 경로가 지나는 거의 모든 집의 출입문 옆에 물통이 놓여있었다. 스페인은 카톨릭 국가인지라 순례자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다. 혹시 목마른 순례자들을 위한 선물은 아닐까라는 새로운 가설에 도달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오스삐따레로에게 물어보았다.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개들이 대문에 영역 표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란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인들은 대체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일종의 민간요법이란다.
짧은 거리를 걸은 만큼 빠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숙소 침대에 동네 상점에서 장 본 저녁식사용 재료들을 올려놓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검색해 보니 도보 15분 거리에 평점이 상당히 높은 식당이 있었다. 13€라는 저렴한 금액에 메누 델 디아를 먹었다. 맛도 있었지만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무엇보다 주인장뿐 아니라 식사 중인 옆 테이블 손님들 까지도 우리에게 정말 친절했다. 언젠가 다시 이 지역을 오게 된다면 꼭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다시 방문하고 싶은 식당 'El Molino'의 살벌한 외관.
숙소로 돌아와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쉬다 보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장 봐온 재료들로 파스타를 만들어 식탁에 앉았다. 프랑스에서 온 가족 그리고 브라질에서 온 변호사가 먼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가족은 매년 1주일씩 순례길을 이어 걷고 있다고 했다. 큰 딸이 네 살일 때 파리에서 출발하는 경로를 시작으로 어느새 16년 차라고 한다. 막내아들은 사춘기 나이인데도 단 한 번도 오기 싫었던 적이 없었단다. 순례길 방문을 특별 연례행사로 도입한 부모,매년 불만 없이 따라와 가족 전통으로정착시키는데 보탬이 된 자녀들이 대단하고 멋졌다. 사연을 듣고 나자 유난히 화목하고 끈끈한 가족 간의 유대가 그제야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부러웠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순례길 완주 이후 일정으로 화제가 넘어갔다. 브라질에서 온 변호사는 포르투갈로 넘어가 Fadu(파두)를 배울 계획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들었던 월드 뮤직 강의에서 접해 본 장르라 호기심이 갔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중심으로 발전된 파두가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브라질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나 보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짧게 한 소절 불러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잠시 감정을 잡더니 눈을 감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가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의 민요가 그러하듯 한(恨)의 정서가 느껴졌다. 노래를 마치자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아내와 나도 감명을 표했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그 순간 브라질 출신 순례자가 우리에게 답가를 부탁했다. 내가 먼저 파두를 요청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하고 아내와 선곡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프랑스 가족이 먼저 전통 민요 한 곡조를 합창했다. 다음이 우리 차례인지라 긴장해서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내와 나 둘 다 좋아하면서 같이 부를 수 있고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노래를 찾다가 선택한 곡은 故김광석 님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실용음악을 전공한 아내가 한 손으로 박자를 쳐주었다. 다들 우리 목소리에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초반에는 떨렸지만 금방 안정감을 찾으며 무사히 완곡했다. 선곡에 시간을 끄느라 생겼을 기대감도 어느 정도 충족시킨 듯했다. 가장 큰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 노래에 대해 물어보았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국민 가수의 대표 곡 중 하나이고 제목은 'Where the wind blows from'이라고 대답했다. 바람을 헤치며 순례길을 걷고 있는 바로 우리들을 위한 노래라며 다들 굉장히 좋아해 주었다. 특히 브라질 출신 순례자는 상당히 인상 깊었는지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열어 원곡을 찾아달라고 했다. 뿌듯했다.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을 아름다운 추억이 또 하나 만들어졌다.
스웨덴에서 온 순례자 Fia(피아)와도 친해졌다. 각각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둘의 엄마이자 스톡홀름에 사는 예술가라고 한다. 순례길 완주 이후 스웨덴에 꼭 놀러 오라며 아내와 SNS 친구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