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3 금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24일 차
Villadangos del Paramo 비야당고스 델 빠라모 ~ Astorga 아스또르가
30.5km / 8시간 35분 / 비 + 흐림 + 맑음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토스트와 주스로 간단히 아침을 때웠다. 숙박 요금도 기부제이면서 조식까지 주는 곳은 흔치 않다. 오스삐따레로인 Salvatore(살바토레)에게 덕분에 잘 쉬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 길을 떠났다.
분명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숙소를 나섰는데 10분도 되지 않아 빗줄기가 떨어지고 강한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군데군데 끼긴 했지만 여전히 맑은 편이었다. 비바람과 햇빛은 일반적으로 공존하지 않는데 이곳에서는 어느새 일상적인 날씨가 되어버렸다.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무지개가 뜬다. 오늘도 그러했다. 순례길에서 처음 무지개를 본 날이 생각났다. 화려한 모습에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감상했었다. 비 때문에 가라앉았던 기분도 덕분에 회복됐었다. 이제는 무지개가 보이면 궂은 날씨가 얼마나 우릴 괴롭힐지 두려움과 걱정부터 앞선다. 상황과 경험에 따라 같은 현상도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인생의 진리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30km가 넘는 긴 거리를 걸었기에 휴식도 여러 번 취했다. 오전에는 돌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마을의 카페에서 간식을 먹었다. 약 한 시간 뒤에는 점심으로 준비해 온 샌드위치를 먹기 위해 작은 성당 앞 공터에 들렀다. 마지막 장소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목적지 Astorga(아스또르가) 직전 동네에 있는 어느 바르를 지나는데 가게 입간판의 문구가 눈에 띄었다.
'The best tortilla in the Camino(순례길 최고의 또르띠야)'
아내에게 잠시 쉬어 가는 게 어떠냐 물어보았다. 목적지까지 한 시간가량만 더 가면 되는데 굳이 그래야 하냐고 눈치를 준다. 말없이 입간판에 적힌 글귀를 가리켰다. 오전에 들른 바르에서 또르띠야를 먹지 않았냐며 다시 한번 퇴짜를 맞았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근거가 없었다. 체념하고 발걸음을 떼려는데 아내가 마음을 바꿨는지 들어가자고 한다. 나는 평소 무언가에 대한 욕심이 많지 않은 편이다. 먹고 싶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 내가 같은 제안을 두 번이나 반복했기에 그만큼 간절하다고 느껴졌나 보다.
신난 마음에 문을 열었다. 널찍한 공간에 사람들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자세히 보니 거의 현지인들이었다. 단번에 맛집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운터로 가서 또르띠야와 와인을 한 잔씩 시켰다. 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전에 먹은 간식을 또 입에 대는 것이 순간 내키지 않았다. 아주 가끔 이유 없이 변덕을 부릴 때가 있는데 오늘이 딱 그랬다. 아내에게 속내를 털어냈다. 주문은 이미 했으니 음식을 담아가서 내일 아침으로 먹는 것이 어떠냐고 한다. 마침 점심을 먹고 나서 비어 있는 음식통이 있었다. 명쾌한 해결책이었다. 잠시 후 주인이 또르띠야와 와인 두 잔 그리고 정체불명의 요리가 담긴 작은 그릇을 내주었다. 주문하지 않은 음식이 나와 어안이 벙벙했다. 다른 손님이 주인을 부르는 탓에 궁금증을 해소할 틈도 없었다. 또르띠야에 곁가지로 함께 제공되는 것으로 유추하며 숟가락으로 휘저어보았다. 따뜻하게 데워진 도자기 그릇에는 병아리콩 수프가 담겨있었다. 한 입 먹어 보니 고추기름에서 나는 맵고 짭조름한 맛이 콩의 구수함과 잘 어울렸다. 정작 또르띠야는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덤으로 딸려 오는 음식에서 이미 주인의 정성과 인심이 느껴졌다. 낮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유가 있었다.
계산대에서 직원을 기다리는데 옆에 있던 현지인 두 명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 Corea(꼬레아, 한국을 뜻하는 스페인어)라고 하자 남인지 북인지 묻는다. 사실 남에서 왔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물어보는 사람이 태반이다. 예민한 사람은 무례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나는 오히려 역으로 골탕 먹이는 것을 좋아한다. 북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눈이 동그래져 정말이냐며 놀라는 그들의 반응은 언제나 짜릿한 즐거움을 준다. 눈치가 빠르면 농담임을 알아채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한 번 더 기회를 준다. 나는 힘 있는 집안의 숨겨놓은 자식이고 비밀 요원이 항상 따라다니며 보호해주고 있다 하면 대부분 그제야 알아차리고 웃는다. 오늘 만난 이들은 촉이 좋은 편이었다. 남은 여정의 안녕을 빌어주는 부엔 까미노 인사를 뒤로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대체로 평탄한 길을 걸어 8시간 30분 만에 아스또르가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먼저 온 순례자가 체크인하는 동안 여권 지갑을 꺼내려 가방을 내려놓고 방수 커버를 벗겼다. 항상 위쪽 주머니에 보관하기 때문에 금방 손에 잡혀야 하는데 아무리 뒤적여도 찾을 수 없었다. 옷 주머니에 있나 싶어 바지와 외투도 샅샅이 훑었다.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잠시 기다려 달라 말하고 옆으로 빠져 가방의 모든 짐들을 꺼내며 본격적인 수색을 했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여권 지갑을 챙기는 것은 내 임무이기 때문에 아내가 갖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휴식을 위해 들른 세 곳 중 하나에 놔두고 왔거나 길에 떨어뜨렸을 수 있다. 아니면 바르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것일까? 혼란스러운 와중에 오스삐따레로가 다가와 무슨 일인지 확인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어디에서 출발했느냐고 물어본다. 그제야 경황이 없어 고려하고 있지 않던 또 하나의 가능성이 불현듯 떠올랐다. 도난의 우려가 있어 여권 지갑을 항상 베개 밑에 숨겨놓고 자는데 아침에 깜빡하고 안 챙겼나 보다. 돌이켜 보니 하루 종일 가방에서 여권 지갑을 꺼낸 기억이 없었다. 어젯밤 묵었던 알베르게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조식을 먹고 작별인사를 나눈 살바토레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살바토레 : 여보세요?
나 : 안녕하세요? 살바토레죠? 어젯밤 알베르게에 묵었던 LEE에요.
살바토레 : 여권 때문에 전화했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챙겨놨어요.
살바토레는 간단명료하게 내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부터 들려주었다. 기쁨과 안도의 감정이 일순간 차올라 상기된 목소리로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성을 차리고 혹시 여권을 내가 있는 곳까지 전달해 주는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순례길에서 종종 만나는 자치 경찰들은 위급한 상황에 대응하는 것이 주요 임무 중 하나라고 들었던 터였다. 살바토레는 이미 경찰에 연락을 해놓은 상태이고 여권 지갑을 받으러 오기로 했다고 알려줬다. 다만 아침에 침대 정리를 하며 지갑을 발견 한 직후 전화를 했는데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단다. 스페인의 여유 있고 느긋한 국민성은 경찰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나 보다. 기약 없이 기다릴지 아니면 내가 가던지 결정해야 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하고 전화를 끊었다. 듣고 있던 오스삐따레로가 정류장까지 뛰어가면 15분 뒤에 지나는 버스를 탈 수 있다고 알려줬다. 아내에게 다녀오겠노라 말하고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있었다. 다른 오스삐따레로 한 명은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택시를 이용할 생각이 없는지 의중을 살폈다. 지도 어플로 찾아보니 왕복 약 70km에 요금은 70€(약 10만 원)가 예상된다고 나와있었다. 시간은 더 걸리지만 저렴한 버스를 이용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오스삐따레로는 택시 기사가 친한 지인인데 상황을 듣고는 35€만 받겠다고 했단다. 절반 가격이 믿기지 않아 편도 요금이냐고 물어보니 왕복 요금이란다. 그래도 의심이 남아 다시 한번 정확한 경로를 확인해 보았다. 현재 위치에서 아침에 출발한 마을의 알베르게까지 오가는 것이 맞단다. 그 조건이면 나쁘지 않다는데 아내도 동의했다. 이왕이면 빠르고 편하게 이동하는 것이 낫다. 살바토레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알려주었다.
10여분 정도 후 차량 한 대가 알베르게 입구로 다가왔다. 아내는 숙소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택시를 주선해 준 자원봉사자와 차량으로 향했다. 외형은 그냥 일반적인 승용차였다. 지붕과 외관 어디에도 택시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없었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오스삐따레로가 운전사와 반갑게 인사하는 것을 보며 걱정이 옅어졌다. 영업용 택시가 아니고 우버(Uber)와 같은 개인 차량 호출 서비스로 부수입을 올리는 용도인 듯했다.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운전석에서 나를 반겼다. 정확한 목적지와 요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악수를 나누고 안전띠를 매었다. 영어가 서툰 기사님과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더듬더듬 스페인어로 몇 마디 건네어 보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힘겹게 찾은 공통 관심사 맥주 이야기로 잠시나마 어색한 공기를 메웠다.
아침에 출발했던 마을로 가는 동안 종일 걸으며 지나 온 길이 보였다. 8시간이 넘는 수고 끝에 겨우 이만큼 왔는데 차를 타고 되돌아가니 허무하리 만치 금방이다. 드문드문 늦은 시간까지 걷고 있는 순례자들이 눈에 띄었다. 왠지 안쓰러워 보였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고 있나 싶었다. 다른 누군가도 나를 보며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 도 있겠다.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30여분을 달려 출발지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살바토레가 여권지갑을 들고 반겼다. 두 손으로 공손히 넘겨받고 고마움에 포옹을 건넸다. 지갑 속 내용물도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 보란다. 사실 안에는 현금 200€가 들어있었다. 지갑을 받자마자 바로 열어서 안을 확인하면 괜스레 살바토레를 의심하는 것으로 비칠까 싶어 차에 타서 살짝 엿볼 생각이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걱정 말라는 듯 살바토레의 얼굴은 평온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미 지갑을 열어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모든 것이 그대로 들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지갑 안에는 현금과 여권이 담겨 있었다. 살바토레는 아마도 하늘이 내려 준 천사가 아닐까 싶었다. 다시 한번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차량으로 뛰어갔다. 아내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아스또르가에 도착해서 기사님에게도 진심 어린 감사인사를 전했다. 마침 택시를 연결해 준 자원봉사자가 숙소 밖에 나와있었다. 역시나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비로소 알베르게에 체크인했다.
간단히 정비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평점이 괜찮은 식당에 들어가 돼지 등갈비와 부리또를 주문했다. 얼마 후 음식이 나왔는데 둘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등갈비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옆에서 식사를 하던, 그리고 마침 식당 안으로 들어오던 순례자 친구들도 고기를 보고는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갈빗대와 살이 쉽게 분리될 정도로 푹 삶아졌고 양념의 간도 적당했다. 다 먹기에는 양이 많아 남은 부리또는 또르띠야와 함께 내일 먹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스포츠 의류 매장에 들러 방한용품 몇 가지를 구매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옷들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기온이 너무 떨어지는 바람에 대비가 필요했다. 쇼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다시 한번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나갈 때까지는 4인실에 우리 둘 밖에 없었는데 그새 침대가 꽉 찼다. 그중 한 명은 어젯밤 나를 괴롭히던 핀란드 출신 순레자였다. 혹시라도 말을 걸까 싶어 일기장과 양치도구를 챙겨 방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공용 공간에서 긴박했던 하루 일과를 기록하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바로 침대에 올라 침낭을 뒤집어썼다. 설마 이렇게 까지 했는데도 어제처럼 말을 걸진 않겠지. 부디 내일 아침까지 아니 남은 여정 내내 조용히 지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