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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May 30. 2024

아내가 웅덩이에 빠진 날

25일 차 : 아스또르가에서 라바날 델 까미노까지

2023.11.4 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25일 차


Astorga 아스또르가 ~ Rabanal del Camino 라바날 델 까미노

21.19km / 6시간 58분 / 흐림 + 비바람 + 맑음




그저께 저녁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 질문 폭격을 해대던 핀란드 출신 룸메이트는 다행히 아침까지 조용했다. 출발 준비를 하며 일기 예보로 확인한 비 소식만 몇 마디 던질 뿐이었다. 나를 괴롭혀댄 게 미안했는지 오히려 작은 선물을 건넸다. 자신이 쓰려고 산 다섯 묶음짜리 여행용 티슈의 부피가 너무 크다며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앞으로 계속 엮이고 싶지 않아 한사 거절했는데 고집불통이었다. 역시나 남 말은 듣질 않는다. 가방에 여유 공간도 있고 가벼워서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았다.




역대급 최악의 날씨로 인해 걷는 내내 정말 힘들었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하루 종일 떨어져 우비를 벗을 수 없었다. 날이 갑자기 푸근해지는 바람에 걸을수록 몸에서 점차 열이 올라왔다. 비옷 안에 갇힌 습한 열기는 겨드랑이와 등에 땀을 맺히게 만들었다. 중간중간 가던 길을 멈추고 옷가지들을 하나씩 벗어야 했다. 어제까지 그렇게 춥더니 당최 갈피를 못 잡겠다. 오후가 되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거센 바람이 우릴 향해 불어왔다. 강한 역풍을 뚫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 뒤에서는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앞에서는 빗방울이 시야를 가렸다.


변덕스럽고 괴팍한 날씨 덕분에 무지개를 원 없이 봤다. 남은 순례 기간 동안 더 이상 안 나타났으면 한다.


공포의 쌍 무지개




내일은 레온 산맥(Montes de León, 몬떼스 데 레온)을 넘어야 한다. 우리 보다 하루 이틀 일정이 앞선 다른 순례자들에 의하면 정상 부근의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고 눈까지 내렸단다. 어제 머문 Astorga(아스또르가)에는 순례자를 위한 의류와 장비들을 파는 상점이 있었다. 추운 날씨와 눈 소식에 놀란 순례자들은 상점에서 저마다 필요한 물건들을 사느라 분주했다. 문제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10€면 살 수 있는 보온장갑도 20~30€에 팔고 있었다. 산맥을 넘기 전까지 지나는 마을들에는 더 이상 스포츠 용품점이 없다. 때문에 금액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 경제 원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순례자들을 등쳐 폭리를 취하는 행태가 괘씸했다.


얼마 전 레온에서 한국인 순례자 몇 명과 한식·삼겹살 파티를 즐길 때 함께 했던 보O 님은 기지를 발휘했다. 바가지요금을 지불하는 대신 마트에서 저렴한 고무장갑을 산 것이다. 설거지를 하거나 김장할 때 끼는 그 고무장갑이 맞다. 오늘 아침 로비에서 만난 보O님은 어제 구매한 흰색 고무장갑을 흔들며 방수도 되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쓸 수 있어 실용적이기까지 하다며 자랑했다.





코스 중반 이후부터는 한참 동안 산길을 걸어야 했다. 산길 곳곳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웅덩이를 만나면 신발이 덜 젖으면서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는 최적의 경로를 찾아야 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웅덩이를 지날 때 진흙에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지 않도록 한 발씩 조심해서 디뎌야 한다. 육체적, 정신적 체력 소모가 훨씬 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수 십 개의 웅덩이들을 지났다.


산 길 끝에서 우리 앞을 가로막은 마지막 녀석은 반경이 상당히 넓었다. 흙탕물 때문에 깊이가 가늠되지 않았지만 결코 얕아 보이진 않았다. 둘레를 따라 길게 자란 잔디와 나무들로 인해 우회할 수 있는 경로가 막혀 있었다. 웅덩이 중간에 누군가 옮겨 놓은 커다란 돌덩이 2개로 만든 징검다리가 유일한 통로였다. 이 것만 넘으면 바로 옆에 보이는 포장도로로 순례길이 이어져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희망을 품고 아내가 먼저 연못 앞으로 다가갔다. 뒤에 오는 사람도 없으니 서두르지 말고 마지막까지 집중하라고 독려해 주었다.


아내는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첫 번째 돌 위에 올랐다. 안정적이었다. 이제 하나 남았다. 두 번째 돌의 양 옆으로 스틱을 옮겨 흙탕물 때문에 보이지 않는 바닥을 더듬더듬 짚었다. 자세를 잡고 왼발을 천천히 두 번째 돌 위로 옮겼다. 돌과 웅덩이 끝의 거리가 조금 멀어 살짝 점프해서 오른발만 땅에 디디면 끝이었다. 짧은 기합과 함께 첫 번째 돌에서 오른발을 떼는 순간 왼발 밑에 있던 돌이 뒤로 기울면서 아내 몸이 휘청였다. 아내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 난 일이라 뒤에서 잡아 줄 새도 없었다. 수면 위로 드러난 돌의 모습은 평평했지만 아래쪽은 바닥과 완전히 맞닿아 있지 않았나 보다.


놀란 마음에 스틱을 집어던지고 웅덩이 안으로 들어가 아내를 건져 올리려 했다. 허나 아내가 메고 있던 가방 무게를 간과한 나머지 힘이 충분하지 않았다. 아내는 반쯤 일어났다가 다시 물속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온 힘을 다해 재차 팔을 끌어당겼다. 우여곡절 끝에 뭍으로 빠져나와 살펴보니 정말 다행스럽게도 가방은 젖지 않았다. 하마터면 속옷과 침낭이 전부 젖는 불상사가 생길 뻔했다. 백팩까지 덮는 트래킹용 우비를 입은 덕분이었다. 바지 뒷면만 축축해져 있었다. 아침에 핀란드 순례자가 준 휴지로 진흙과 물기를 닦았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하긴 했는데 하필 그게 오늘이었다.


응급조치를 마치고 걸어가는데 조금 전의 참사가 못내 아쉬웠다. 마지막 한 걸음만 더 신경 썼으면 넘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얘기를 나누다 은연중에 마음이 드러나 볼멘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다친 곳은 없는지 괜찮냐며 걱정은 못 할망정 질책하는 것이 서운하단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면 그게 잘 안된다. 아내도 균형을 잃고 싶지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자 미안함이 차올랐다.


아내는 이 사진을 찍고 멀리 보이는 두 번째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순례길을 걷기 전에는 내가 갖고 있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2주가량 남은 상황에서는 명확한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방향 설정만큼은 제대로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어떻게 해야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감을 잡았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도 없다. 내 선택, 내 책임 그리고 내 인생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단순한 진리이다. 나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이 기회를 통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고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속 어딘가에 굳건히 자리 잡았다. 몸은 바쁘고 고되지만 정신은 도리어 맑아지게 하는 이곳의 환경 덕에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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