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차 : 라바날 델 까미노에서 몰리나세까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26일 차
오늘도 맑았다 흐렸다 반복되는 미친 날씨가 계속되었다. 당연히 비도 하루 종일 내렸다. 기온은 생각보다 낮지 않았지만 여전히 쌀쌀했다.
레온 산맥(Montes de León, 몬떼스 데 레온)을 넘기 전 간식을 먹기 위해 바르에 들렀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11일 차에 묵은 Belorado(벨로라도)의 알베르게에서 함께 공동 만찬을 즐긴 Flo(플로)가 앉아있었다. 독일 사람은 유머 감각이 없고 고리타분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게 해 준 재미있고 유쾌한 친구였다. 집안 사정으로 순례를 마치고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갑자기 나타나 깜짝 놀랐다. 반가움에 포옹을 나누고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독일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함께 걷던 동료들이 그리워 다시 찾아왔단다. 플로의 의리 있는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유럽 내에서의 이동이 이들에게는 흔한 일이라 언제든 부담 없이 오갈 수 있나 보다. 큰 결심을 내리고 온갖 준비를 해야 겨우 올까 말까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남은 기간 동안 무사히 순례를 마치라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며칠 동안 내린 비와 눈 때문에 오늘 걸을 길이 전부 진흙밭에 물웅덩이 투성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질퍽거리는 원래의 경로로 갈지 바로 옆에 나란히 놓인 포장도로로 걸을지 저 마다 의견이 분분했다. 우리는 어제의 참사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에 거리가 길어지더라도 걷기 편한 찻길을 선택했다.
순례길 명소 중 하나인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에서 잠시 쉬었다. 높게 세워진 기둥과 아래에 쌓인 돌무덤에는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이들의 염원이 담겨있었다. 걷는 동안 찾은 조그마한 자갈을 내려놓으며 아내와 가족의 행복을 빌었다. 예전 같았으면 물질적인 풍요를 소망했을 텐데 어느새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나 보다.
작은 마을 El Acebo(엘 아세보)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라디에이터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젖은 옷가지를 말리고 얼어있던 몸도 녹였다. 메누 델 디아가 훌륭했다. 와인이 한 병 통째로 나오고 음식의 양과 질 모두 만족스러웠다. 딱 한 가지, 요리가 나오는데 시간 간격이 너무 긴 점이 아쉬웠다. 전식, 본식 그리고 후식을 다 먹고 시계를 보니 2시간이 지나있었다. 갈 길이 멀어 부랴부랴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섰다.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지는 와중에 머리 위에서는 해가 비치고 있었다. 주변 경관이 멋지고 나름 운치도 있었지만 순례자에게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10시간 만에 Molinaseca(몰리나세까)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18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원래 계획했던 목적지인 Ponferrada(뽄페라다) 까지는 6km를 더 가야 한다. 2시간가량을 더 갈지 여기에서 멈출지 논의했다. 후자를 선택하기로 금세 합의했다.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근처 알베르게에 체크인하고 샤워와 빨래를 마친 후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양고기가 먹고 싶어 마을에 있는 모든 식당을 다 돌았으나 어디에서도 팔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눈여겨보았던 바비큐 전문점에 들어가 앉았다. 현지인들이 가장 많기도 했고 무엇 보다 가게 입구에 놓인 커다란 화덕이 눈길을 끌었다.
소고기 스테이크와 오징어 튀김을 주문하고 기다리자 얼마 후 주인장이 요리를 내왔다. 일순간 시끌벅적하던 가게에 정적이 흐르더니 우리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다. 멀리 동양에서 온 이방인이 내 단골집의 주력 메뉴를 과연 마음에 들어 할지 지켜보는 듯했다. 주인은 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쥐어주더니 반으로 한 번 잘라 보란다. 고기를 얼마나 잘 구웠는지 어서 확인해 달라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겉이 바삭하게 구워진 스테이크 윗면에 칼을 갖다 댔다. 살짝 눌렀는데도 핏기가 몽글몽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번엔 제대로 힘을 주어 반으로 갈랐다. 과장 조금 보태서 잘 삶아진 감자를 써는 듯한 부드러운 질감이 칼날을 통해 손끝으로 전해졌다. 단면을 보니 전체가 균일한 색을 띠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익힘 정도 일 때의 빛깔이었다. 아직 먹어 보지 않았음에도 맛과 향이 그려졌다. 서둘러 한 입 크기로 자른 조각을 입에 넣었다. 고기가 제법 두꺼웠음에도 식감이 굉장히 부드러웠고 씹을 때마다 진하고 풍부한 육즙이 양볼 가득 터져 나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콧소리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인장에게 들어 보이자 이내 흐뭇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숨죽여 지켜보던 다른 손님들도 그제야 안심한 듯 다시 왁자지껄 활기를 되찾았다. 지금껏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스테이크였다.
어제저녁에 순례길을 걸으며 얻은 깨달음을 아내와 공유했다. 육체는 힘들지만 정신이 맑아진다는 것에 공감한단다. 홀로 고민 끝에 정리한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지지를 받았다. 걷는 동안 시간을 허투루 쓰진 않았나 보다. 자신감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