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이른 5시 반에 눈이 떠졌다. 몇 번 뒤척이다 다시 잠드는 것을 포기했다. 아내쪽 침대를 보니 수건으로 친 커텐 사이로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일어났는지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듯했다. 오늘 갈 길도 먼데 일찍 출발하는 게 어떠냐 제안했다. 아침 공기가 워낙 쌀쌀한 탓에 따듯한 침낭에서 나오고 싶지 않을 수 있어 조심스러웠으나 다행히 아내는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바람은 강하지 않았는데 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다. 경로는 불빛 하나 없는 숲길로 이어졌다.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걷는데 전방을 환히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평소 심해 공포증을 가지고 있어 무서웠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무언가 튀어나올 수 있다는 상상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깜깜한 숲길을 걸으면서도 비슷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희미한 스마트폰 불빛, 그리고 연약한 아내에 의지해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막상 위급한 상황이 발생해도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마을이 나왔고 날도 서서히 밝아졌다. 아내가 없었으면 혼자서는 절대 못 갔을 것이다.
어제 묵은 마을의 모든 식료품점들이 닫았던 탓에 아침거리를 준비하지 못했다. 공복으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직전 이제 막 문을 열고 있는 바르가 나타났다.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순례자 친구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한동안 못 보던 미국 출신 Jarrett(재렛), Keith(키쓰) 그리고 네덜란드 출신 Roberts(로버츠)와 차례대로 인사를 나눴다. 셋은 주로 이른 시간에 출발해서 14시경 일정을 마친다. 걸음도 상당히 빠른 편인지라 8시경 숙소를 나서는 우리와 길 위에서 만나기가 힘들었다. 같은 알베르게에 묵어야 그나마 마주칠 수 있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던 중 재렛과 로버츠는 늦게 그리고 느리게 움직이는 순례자들이 이해가지 않는단다. 자신들은 도착지에서 점심을 먹고 마을을 둘러보거나 휴식까지 취한다며 으스댔다. 당황스러웠다. 우리 부부를 겨냥한 소리로 들렸다.
사람마다 신체 능력이 다르니 걷는 속도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 기본적인 생각조차 하지 않고 빨리 걷지 않는 이들이 답답하다니. 한 달이나 넘게 걸으며 느낀 게 겨우 그 정도라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아침부터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우리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기본적인 신체 능력과 체력은 저마다 달라서 빨리 걷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더군다나 나는 너희들 보다 더 빨리 걸을 수 있지만 아내를 버려두고 가버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사는 너희는 이곳을 방문하는 게 별거 아닐지 몰라도 우린 그렇지 않아. 어렵게 먼 길을 찾아왔으니 유럽의 시골 풍경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가고 싶은 마음도 있어. 여기에 온 목적은 빨리 걷기 위한 게 아니고 머리를 식히면서 여러 생각들을 하고 싶어서야. 나에게 순례는 경주가 아니야."
좀 더 연륜이 쌓인 로버츠는 그나마 이해한 듯하다. 내 얘기를 듣더니 그럴 수 있겠단다. 재렛은 조식을 다 먹고 먼저 식당을 나서면서 끝까지 비아냥 거렸다.
"See you, slow folks."(또 보자, 느림보들아.)
옆에 있던 키쓰가 그러지 말라고 나무랐으나 재렛은 쌩하니 가버렸다. 며칠 전 우리 보고 택시를 타고 온 것 아니냐며 의심하더니 오늘도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재렛과의 관계를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씁쓸했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걸은 탓에 오른발부터 트레킹화 안쪽이 젖기 시작했다. 길에는 호수인지 강인지 모를 만큼 거대한 물웅덩이들이 수 없이 많았다. 처음에는 신발을 보호하기 위해 조심히 발을 디뎠다. 양쪽 양말이 모두 축축해진 뒤부터는 물이 고여 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첨벙거리며 지났다. 더 이상 지켜야 할 뽀송함이 사라진 이후에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동심으로 돌아간 듯 재밌기도 했다.
곳곳이 패인 흙길을 벗어나 포장도로가 나왔다. 출발 8시간 만이었다. 지도 어플을 열어보니 남은 구간에서 물웅덩이를 만날 확률이 낮아 보였다. 사실 어플만 보고는 알 수 없지만 막연한 기대를 걸고 싶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양말을 벗어 두 손으로 잡고 힘껏 뒤틀었다. 큼지막한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발바닥이 불어 있었으나 손으로 몇 번 쓸어내리는 것 외에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다. 여전히 젖어있는 양말을 힘겹게 다시 신고 트레킹화에 욱여넣었다. 아까보다는 다소 나아졌다.
18:20쯤 알베르게에 체크인했다.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해서 어두워질 때 도착했다. 가장 오랜 시간인 11시간 17분이 걸렸다. 숙소 바로 앞 식료품점에서 파스타 재료와 와인 한 병을 사 와 요리해 먹었다. 공용 식당에 난로가 있어서 신발과 양말을 말릴 수 있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같은 테이블에 앉은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 출신 순례자들과 친해져 와인을 나눠 마시면서 많은 얘기를 했다.
내일이면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에 입성한다는 사실에 모두들 들떠있었다. 이후의 일정에 대해 얘기하다가 크리스마스를 파리에서 보낼 계획임을 알렸다. 프랑스 출신 순례자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오게 되면 꼭 연락을 달라며 SNS 친구를 맺었다. 파리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가본 수많은 식당과 카페들의 후기를 기록한 목록도 공유해 주었다. 파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현지인 추천 맛집 리스트를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이제 약 10km만 남았다. 아내와 나의 일정은 이후 피스떼라까지 이어지지만 그래도 1차 관문 통과를 앞두고 있어 설렜다. 친한 한국인 순례자들과 한식 파티도 계획되어 있다. 어서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