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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May 03. 2024

마음만은 따듯한 하루

13일 차 : 아헤스에서 부르고스까지

2023.10.23 월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13일 차


Ages 아헤스 ~ Burgos 부르고스

22.17km / 6시간 10분 / 흐림




어제저녁에 먹고 남은 피자 한 조각으로 아침을 때우고 출발했다. 밖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양손에 스틱을 쥐어야 안정적으로 걸을 수 있다. 조명을 들고 걸을 여력이 없다. 반면 나는 스틱이 없어도 괜찮다. 오른손에 핸드폰을 쥐고 조명을 켠 채 앞장섰다. 걷는 동작에 맞춰 자연스럽게 팔을 앞뒤로 흔들며 아내의 발밑과 전방을 교대로 밝혔다. 기운이 쌩쌩하고 해가 뜨기 전에 최대한 진도를 빼고 싶었다. 속도를 끌어올렸다. 어둠 속에서 아내가 헛디딜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정면보다는 아내 쪽을 비추는 비율을 더 높였다. 짧은 순간 밝혀진 정면의 이미지를 머리에 저장했다가 기억의 끄트머리에 왔을 때 다시 팔을 앞으로 휘두르는 방식으로 순항을 이어갔다. 날이 제법 추웠지만 슬슬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걷다가 전방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앞을 잠깐 비췄는데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정확히는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사람이 너무 크게 당황하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딱 그랬다. 눈앞에 새까맣고 거대한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얼핏 짧고 굵은 검정 털이 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 동물 같았다. 땅만 보며 걷던 아내는 내 가방에 부딪히고서야 멈췄다. 숨죽이며 핸드폰 조명으로 다시 비추었다. 멧돼지였다.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자고 있거나 죽은 듯했다. 우리보다 앞서 출발한 순례자들도 있을 텐데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면 후자 쪽일 확률이 높다. 정황상 바로 옆 도로를 건너다 차에 치여 즉사한 사체를 운전자가 순례길 위로 옮겨 놓은 듯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침착함을 되찾자 그제야 날이 밝아졌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 우회했다.


길 한복판에 놓인 멧돼지 사체.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게 느껴진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기온이 더 떨어질 텐데 큰일이다. 어제도 냉기 때문에 새벽부터 잠을 뒤척였다. 걷는 동안 스틱을 쥔 손등이 시리다. 한국에서 찾아봤을 때는 분명 10월 스페인 날씨가 이 정도로 춥지는 않다고 했다. 방한용품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대책을 강구해야겠다.


물집이 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 느슨하게 묶은 신발 사이로 모래알 크기의 돌멩이들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발을 끄는 것도 아닌데 도무지 막을 수가 없다. 신발을 벗어 돌을 털어내기 위해 중간중간 멈추다 보면 리듬이 깨져 버려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저께부터인가는 오른쪽 신발 깔창에 한 녀석이 깊숙이 박혀버렸다. 오만짓을 해도 빠지지 않기에 할 수 없이 애써 무시하고 걸었다. 결국 깔창과 양말에 구멍이 생겼다. 신발에 들어온 다른 돌멩이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움푹하게 파인 부위로 모여들었다. 결국 맞닿은 발바닥 부위에 물집이 잡히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목적지 Burgos(부르고스) 대도시인지라 다행히 스포츠 용품 매장이 있었다. 깔창을 새로 사서 끼우고 잠깐 걸어봤는데 훨씬 나았다. 근심 하나를 덜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묵는 알베르게는 성당 건물의 일부를 개조한 형태이다. 공립 치고는 내부가 상당히 깨끗하고 시설도 좋다. 인당 10€의 저렴한 숙박요금에 기부금을 내면 저녁과 다음 날 아침까지 먹을 수 있다. 우리가 부부라고 하자 오스삐따레로가 전용 객실로 안내해 주었다. 원래는 성별에 따라 분리된 침실을 써야 하는데 부부의 경우에는 2층 침대 2개가 놓인 4인용 방을 준다고 한다. 운 좋게도 다른 커플이 오지 않으면 4인실을 독차지할 수 있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도시 구경 겸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아내가 찾아 놓은 일식당으로 향했다. 뜨끈한 국물 요리가 먹고 싶어 애써 찾아갔는데 직원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했다. 실망감과 배고픔을 부여잡고 다급하게 지도 어플을 열었다. 가까운 거리에 중식당이 있었다. 누군가 올린 메뉴판 사진만 얼핏 봐도 음식 종류가 수십 가지는 되어 보였다. 그중에 국물 요리 하나쯤은 있겠지 하는 기대를 품고 달려갔다. 더듬더듬 중국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완탕면과 다른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다. 직원이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나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도시를 구경하고 들어가려 했는데 객실 창가에 널어놓은 빨래가 생각났다. 주요 관광지가 몰려있는 도심은 숙소 반대 방향이라 빨래 혹은 관광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우리는 시내 구경을 골랐다. 날도 금세 어두워질 시간대였고 빗줄기가 약해서 젖은 옷가지를 침대 난간에 걸어 두면 밤새 마를 거라 판단했다. 부르고스 대성당과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알베르게로 복귀해 객실로 향하던 도중 오스삐따레로와 마주쳤다. 그녀는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비가 와서 빨래를 대신 들여놓았다고 했다. 우리는 안 그래도 걱정했었다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도 예상치 않게 인류애를 적립했다.




저녁은 오스삐따레로와 함께하는 community dinner(공동 만찬)였다. 숙소를 운영하는 자원봉사자들은 프랑스 출신 부부란다. 은퇴 후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세계 여행을 다니다가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것에 삶의 의의를 두게 되었다고 했다. 투철한 신앙심만으로 그리 한다는 것이 존경스러웠다.


숙소 건물 1층 성당에서는 매일 저녁 미사를 드리는데 이곳에 머무는 순례자들을 축복해 주는 특별한 의식이 함께 진행된다고 하여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내려갔다. 미사의 마지막 순서가 되자 신부님이 우리를 앞으로 불러 세웠다. 한 명 한 명 머리에 손을 얹고 남은 여정 동안 무사 안녕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생기면서 자신감이 차올랐다.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페이스북 계정에 게시된 그날 저녁 순레자들의 모습


2층으로 돌아와 식당 옆 응접실에 모여 앉았다. 오스삐따레로가 작은 종이를 나눠주었다. 어제 이곳에 머문 후 오늘 아침 출발한 순례자들이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기도문을 다 같이 읽었다. 내일이 되면 다른 순례자들이 우릴 위한 기도를 해준다고 한다.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뜻깊고 의미 있는 밤이었다.




부르고스가 제법 큰 도시라 이곳에서 이틀씩 연박하는 사람도 제법 있다고 한다. 우리는 체력적인 문제도 없거니와 굳이 그럴만한 이유를 찾지 못해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벌써 1/3이 지났다. 아니 거의 반절 왔다. 시간이 지나는 것이 너무 아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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