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0 금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10일 차
Najera 나헤라 ~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
21.57km / 6시간 15분 / 날씨 흐리고 바람 미친 듯 많이 붐
어제 저녁 둘 다 먼 거리를 걸은 피로와 과음의 여파까지 더해져 눈을 감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내 역시 숙면을 취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한다. 옆 침대를 쓰던 프랑스 출신 순례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내가 지난밤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한참 자던 와중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더니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했단다. 마음 여린 아내는 비몽사몽 한 와중에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쳤다는 죄책감에 연신 사과했다고 한다. 이후 다시 코를 골까 봐 선잠을 자며 밤새 설쳤다고 했다. 황당했다. 우리는 열흘 가까이 걸으며 매일 도미토리 형태의 숙소에서 잤다. 항상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렸으나 우리뿐 아니라 같은 침실을 쓰는 그 누구도 불평불만하지 않았다. 본인이 잠귀가 예민하면 귀마개를 끼던지 아니면 돈을 더 지불하고 1인실에 묵으면 된다. 코를 고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숙면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다. 정작 당사자는 본인이 코를 고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코를 골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골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들 마땅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또한 순례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옆 자리 사람이 이해되기도 했다. 아내는 가끔 피곤한 날 음주 후에 코를 골며 자는데 나도 그 소리에 쉽사리 잠들지 못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오죽했으면 와서 깨웠을까 하는 측은함도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아내가 씻으러 갔고 잠시 후 프랑스 출신 순례자가 돌아와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어제 코골이 소리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미안하다며 아내를 대신해 재차 사과했다. 뜻 밖에도 오히려 자신이 더 미안하다는 반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돌이켜 보니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었다며 아내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했다. 마음의 짐이 덜어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금방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아내를 깨우지 말지라는 원망도 조금 되었다. 나중에 듣게 되었지만 아내와도 아침에 서로 사과를 주고받으며 잘 마무리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7:30 쯤 출발했다.
출발 전 일기예보를 확인해 봤을 때 비 소식이 있었으나 다행히 오지 않았다. 대신 하루 종일 정말 강한 바람이 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의 거센 역풍과 매 걸음 싸워야 했다. 옷으로 가리지 않은 팔다리 부위와 얼굴은 날아오는 모래 때문에 따끔거렸고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바람막이와 모자를 꺼내어 온몸을 감싼 채 걸어야 했다.
걷는 도중 허기가 느껴지거나 체력적으로 지칠 때는 비록 적은 양일지라도 음식물을 섭취하면 도움이 된다. 마침 멀지 않은 거리에 마을이 있으면 식료품점 혹은 바르에 들러 열량을 보충할 수 있다. 불행히도 순례길을 걷다가 시기적절하게 영업 중인 식료품점 혹은 바르를 찾을 확률은 매우 낮다. 간식거리를 마련해 들고 다니면 긴급한 상황에서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부피가 작고 가벼우면서 먹기에 번거롭지 않은 것이 좋다. 우리는 마트에서 파는 1유로짜리 땅콩 한 봉지를 비상식량으로 구비해 놓았다.
작은 언덕과 평지가 반복되는 구간을 지나는 도중이었다. 길은 평탄했으나 바람이 우릴 너무나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어제 준비한 점심 도시락을 먹기는커녕 바람을 피해 쉴 공간조차 없었다. 지도 어플로 확인해 보니 가장 가까운 마을은 한참을 가야 했다. 아내는 지쳤는지 몹시 힘겨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땅콩 좀..."
"땅콩? 어...어. 알겠어."
그저께 산 땅콩 봉지는 아직 개시를 하지 않은 상태여서 가방 깊숙이 들어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 소식 때문에 배낭에는 커버를 씌어놓은 상태였다. 땅콩을 꺼내려면 적잖이 시간이 걸릴 듯하여 아내에게 다시금 말했다.
"먼저 천천히 걸어가고 있으면 내가 꺼내서 갖다 줄게."
1초도 길 위에서 허비하고 싶지 않은 저의를 이해했는지 아내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재빨리 가방을 내려놓고 커버를 벗겨내서 이중으로 잠긴 입구를 열었다. 요리할 때 필요한 소량의 조미료 등이 담긴 비닐을 풀고 안에서 땅콩 봉지를 빼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고개를 들어 실눈으로 아내의 위치를 파악해 보니 생각보다 멀리 가 있었다. 바람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다급히 역순으로 가방을 잠그고 커버를 씌운 후 어깨에 둘러멨다. 가슴끈과 허리끈을 잠그고 스틱을 주워 들었다.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아내에게 땅콩을 먹이고 싶었다. 바람이 워낙 강했기에 생각처럼 속도를 내는 게 쉽지 않아 좀처럼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체감상 10분 정도는 걸린 듯했다. 아내를 겨우 따라잡고 땅콩이 날아갈까 바람을 등진 채 봉지를 뜯어 양손 가득 부어주었다. 아내는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는 우걱우걱 씹으며 더 달라고 했다. 급히 먹다 사레들릴까 싶어 다 삼키면 주겠다고 했다. 그 사이 나도 한 움큼 집어 먹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다른 순례자 무리가 보였다. 부엔 까미노 인사를 주고받으며 땅콩을 먹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들도 힘들었는지 고맙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중에 듣게 되었지만 아내는 그 순간 땅콩이 없었으면 쓰러졌을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다. 앞으로 비상식량이 동나지 않게 미리미리 준비해 놓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이후 땅콩 봉지는 언제든 꺼내기 쉽게 가방 바깥쪽 옆 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되었다.
바람과 맞서 싸우며 걷다가 Cirueña(시루에냐)라는 마을 입구에 위치한 음식점에서 잠시 쉬었다. 따듯한 차와 간단한 음식을 주문해 땅콩만으로 달래기 부족한 허기를 채웠다. 오늘의 도착지인 Santo Domingo de la Calzada(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까지는 7km 조금 안되게 남았었다. 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그런데 그 2시간을 걷는 게 너무나도 버겁게 느껴졌다. 바람이 점차 거세져 몸을 앞으로 기울여야 할 정도였다. 음식점을 나와서 30분쯤 되었을 때는 도저히 끝까지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가서 시루에냐에서 오늘의 일정을 끝내고 싶었다. 내가 이 정도면 아내는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솔직한 심정을 파악해 보기 위해 5분의 간격을 두고 세 차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시루에냐에서 쉬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아내가 조금이라도 동의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면 바로 돌아가려 했다. 의외로 아내는 두 번째까지 단칼에 거절하더니 세 번째 질문에는 그만 좀 물어보란다. 힘없으니까 말 시키지 말라며 도리어 나를 타박하면서 앞장섰다. 목표를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체력과 근력이 나보다 약한 아내가 확고한 모습을 보이자 나도 오기가 생겼다. 그래, 바람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라는 각오를 다지며 아내 뒤를 따랐다.
총 여섯 시간 조금 더 걸려 숙소에 도착했다. 강한 맞바람 때문에 정말 힘들었지만 아내와 함께 걸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나도 점차 아내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샤워를 하며 온몸 구석구석 살펴보았으나 다행히 빈대에 물린 흔적은 없다. 어제 아침 빈대가 발견된 침대 주인도, 그와 함께 걷던 무리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곳에 묵나 보다. 혹시라도 누군가의 옷가지에 숨은 빈대가 우릴 공격할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침대 시트를 씌우기 전 매트리스를 들추며 빈대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깨끗했다. 오늘 밤은 안심하고 잘 수 있겠다.
취침 전 식당 테이블에 앉아 일기를 쓰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