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간직한 태국의 휴양지 피피섬(Phi Phi Island)으로 거처를 옮겼다. 짐을 놔두고 섬을 돌아다니기 위해 숙소로 이동을 했다. 그런데 숙소를 들어가자마자 일반적인 숙박시설에 아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로비 한가운데에 놓여있었다. 사각 캔버스가 덮여있는 복싱 경기장이었다. 정확한 규격은 모르겠으나 얼핏 보더라도 정식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제법 커 보였다. 그리고 곳곳에 안내 문구가 적혀있다. 경기에 참가하면 무료 칵테일을 준단다.
사실 오늘 묵는 곳은 바(Bar)와 숙박시설을 겸업하는 곳이다. 그리고 1층에 자리 잡은 바는 태국의 전통무술인 무에타이(Muay Thai)를 컨셉으로 한다. 늦은 저녁 시간이 되면 식사를 마친 관광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고 나면 직원이 바의 중앙에 자리한 링에 올라가서 경기에 참가할 손님을 찾기 시작한다. 먼저 누군가 손을 들고 참가의사를 밝히면 그 사람을 링 위로 부른다. 직원은 용감한 손님의 손을 잡고 링을 한 바퀴 돌며 앉아있는 다른 손님들에게 물어본다. 이 사람과 경기를 하고 싶은 상대가 있는지. 앉아있는 무리 중에 또 누군가 손을 들면 그 둘은 경기가 성사되는 방식이다. 용기를 낸 두 명의 참가자들은 각각 작은 메달과 버킷(Bucket)이라 불리는 칵테일을 파이트머니로 받는다. 경기 참가자들은 두꺼운 복싱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장착하고 복싱 규칙으로 겨룬다. 발차기와 박치기 공격이 금지되고 후두부와 낭심 가격도 금지다. 총 2라운드를 진행하고 각 라운드는 1분이 주어지며 라운드 사이에는 2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무에타이는 원래 발차기 공격을 주로 사용하지만 일반인이 사용하기에는 부상의 위험이 높기 때문에 금지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설마 누가 참가할까라는 의문을 가졌으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경기 참가자들이 줄을 지었다. 여성 참가자들도 적지 않았다. 나름 종합격투기 스포츠를 좋아하는 방구석 전문가의 시각으로 봤을 때 경기 수준은 기대 이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온몸 빼곡히 문신을 세긴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서양인들이 휘두르는 주먹은 제대로 복싱을 배워본 적 없는 날것 그 자체였다. 온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가드도 느슨하고 스텝도 엉망이다. 대신 한 대만 맞더라도 기절할 정도로 파워가 느껴졌다.나도 참가해보고 싶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내에게 살짝 물어보니 절대 안 된다고 한다. 나도 사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쓸 정도로 참가의향이 강하진 않았다. 다시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링 위를 응시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체중이 더 나가고 나이도 더 많아 보이는 참가자와 호리호리한 체형의 젊은 참가자의 대결이었다. 나이 많은 참가자는 호리호리한 상대방이 두렵지 않았는지 자신은 헤드기어를 벗고 경기를 하겠다며 상대를 자극했다. 젊은 참가자도 이에 질세라 헤드기어를 벗어던지고 경기를 진행했다. 나는 내심 나이 많은 참가자의 거만한 자세를 젊은 참가자가 고쳐주길 바랐다. 세상에는 강자가 많기 때문에 겸손해야 하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젊은 참가자가 실력으로 가르쳐주길 바랐다. 결과는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체중이 더 많은 참가자는 자만했는지 가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며 어설픈 펀치들을 날려댔다. 반면에 청년은 기본기가 좋았다. 가드를 단단히 하면서 정확히 상대방을 보며 주먹을 날렸다. 두어 차례 공방을 주고받자 이미 나이 많은 참가자의 한쪽 얼굴은 변해갔다. 안면에 주먹을 연신 허용하면서 하얀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1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한차례 다운을 당할 정도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2라운드에 돌입해서도 호리호리한 청년이 정확한 펀치로 두 차례 더 다운을 얻어내자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켰다. 청년의 압승이었다. 나는 있는 힘껏 환호성을 지르며 청년의 승리를 축하함과 동시에 거만한 상대방을 비웃어주었다. 통쾌했다. 이후 경기의 모든 참가자들은 헤드기어를 벗고 싸우자는 무례한 도발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당하고 안전한 경기가 무엇보다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에 모두가 공감한 듯 보였다. 나이 많은 참가자는 오늘 일을 계기로 무언가 배워가는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수십 명의 참가자들은 그렇게 서로를 죽일 듯 주먹을 주고받은 후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다음에는 뜨거운 포옹으로 마무리를 했다. 진심을 다해 전력으로 경기에서 땀을 흘리고 나면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생기게 된다. 나도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다년간 수련했기에 그들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경기 결과로 인한 승자와 패자는 갈리지만 둘 다 경기를 통해 배우고 느끼는 점이 분명 생기게 된다. 결국 인생에서는 둘 다 승자가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분출되며 단순한 오락으로 경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관객들의 분위기가 숙연하고 차분해져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관객들이 그랬다. 경기에 참가한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받아 마땅하기에 그들의 용기를 응원하며 승패는 어느덧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잊지 못할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