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이 필요한 날

가끔은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by Lounge And

혼술이 필요한 날


사람 많은 곳을 지나치고 집으로 바로 들어왔다.

문을 닫으니 소리가 절반으로 줄었다.

이 정도면 오늘의 밤을 감당할 만하다.


씽크대에 물 한 컵 먼저.

몸이 먼저 고맙다고 한다.

그다음에야 냉장고 문을 연다.


안주는 거창하지 않다.

남은 제육 한 줌, 두부 반 모, 김치 작은 그릇.

기름기보다 온도가 중요하다.


잔은 얇은 걸로 꺼냈다.

유리 두께가 밤의 속도를 정한다.

오늘은 빨리 가지 않는다.


음악은 가사가 적은 걸로, 볼륨은 손끝보다 낮게.

조용해야 생각이 도착한다.

너무 조용하면 생각이 커지니, 배경만 깐다.


첫 모금이 목을 지나갈 때,

하루가 뒤로 한 칸 물러선다.

그 틈에서 숨이 제자리를 찾는다.


휴대폰은 뒤집어 둔다.

알림은 내 기분과 상의가 없다.

오늘은 내가 먼저 묻고 내가 먼저 듣는다.


혼술은 도망이 아니라 정리다.

말로 풀지 않아도 되는 마음을 액체로 천천히 눌러 둔다.

급한 문장은 내일로 미룬다.


두 번째 잔은 없다.

오늘의 규칙은 “한 잔, 오래.”

잔이 비기 전에 이야기가 먼저 가벼워지게.


두부를 한입, 김치를 얹어 씹는다.

입이 바빠지면 마음이 조용해진다.

단순한 조합이 밤을 가장 잘 붙든다.


창을 조금 열었다.

밤공기가 거실을 한 바퀴 돌고 나간다.

낮의 남은 열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난다.


오늘 잘한 일 세 가지를 적었다.

대단하지 않아도 된다.

‘끝냈다’ ‘미뤘다’ ‘괜찮았다’면 충분하다.


못 한 일도 세 가지만 본다.

나머지는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

오늘은 빚을 세지 않는 쪽을 택한다.


물 한 모금, 잔 한 모금.

속도가 비슷하면 밤이 안 흔들린다.

이 균형이 혼술의 기술이다.


문득,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밤이 고맙다.

그렇다고 외롭지는 않다.

고요는 가끔 사람보다 친절하다.


창밖 골목을 보니 불 꺼진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달빛이 간판 위를 얇게 발라 놓았다.

세상이 조용해야 내 생각도 고개를 든다.


잔 바닥이 보인다.

더 부을 수도 있지만 멈추기로 한다.

멈출 줄 아는 밤은 다음 날을 살린다.


싱크대에 잔을 헹구며 오늘을 마무리한다.

물소리가 감정의 끝을 매만진다.

한 번, 두 번, 세 번이면 충분하다.


불을 끄기 전, 창틀에 팔을 올려 짧게 선다.

이번 주를 여기까지만 들고 가기로.

나머지는 잠이 데려가기로.


혼술이 필요한 날은 늘 똑같지 않다.

그래도 의식은 비슷하다.

물을 먼저, 말을 줄이고, 적정선에서 멈춘다.


잔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등을 편다.

내일의 내가 괜찮을 만큼만 만족했다.

오늘의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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