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다인간

회의 과다, 카페인 과다, 흡연 과다, 스트레스 과다…

by Lounge And

과다인간

(회의 과다, 카페인 과다, 흡연 과다, 스트레스 과다…)


알람보다 캘린더가 먼저 나를 깨운다.

파란 네모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촘촘하다.

과다의 나라에 입국한 첫 순간.


부엌에서 진하게 내린 커피를 한 모금 삼킨다.

몸은 고맙다고 속삭이고, 위장은 살짝 항의한다.

둘의 합의는 대개 두 번째 모금에서 이뤄진다.


회사에 도착하니 회의가 줄줄이 대기 중이다.

회의는 시작보다 종료가 어렵다.

그래서 시작과 동시에 “무엇을 정하고 나갈까요?”를 먼저 올린다.


첫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회의 링크가 뜬다.

나는 물 한 컵으로 급수를 하고, 메모에 네 칸을 연다.

목적, 결정, 담당, 기한.

과다는 기록을 만나야 비로소 사람을 덜 흔든다.


두 번째 회의에서 숫자가 넘친다.

숫자는 힘이지만 때로는 소음이다.

한 장 요약을 위로 올리고 세부는 아래로 내려, 과다를 층층이 가라앉힌다.


중간 쉬는 시간에 캔커피를 집을 뻔했다.

대신 물 두 모금과 창밖 30초.

카페인은 빠르게 빌려 쓰고, 물은 천천히 갚는다.


흡연실 앞에 서서 한 발짝 물러난다.

담배를 권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의 나는 “첫 개비를 30분 뒤로 미루기, 사이 개비는 물로 바꾸기” 같은 느슨한 규칙으로 버틴다.

완벽보다 거리를 벌리는 쪽이 오래 간다.


오후가 시작되면 심장이 이따금 알림처럼 뛴다.

그럴수록 탭을 다섯 개로 줄이고, 말의 길이를 절반으로 줄인다.

과다를 이기는 기술은 대체로 덜 하는 법에서 나온다.


회의와 회의 사이 10분은 탕비실이다.

물, 창밖, 3줄 메모.

이 10분이 무너지면 뒤 구간이 우르르 무너진다.


세 번째 회의에서 말이 엇갈렸다.

감정은 커지고, 논리는 작아진다.

그럴 때일수록 “결정 2, 보류 1, 추가 자료 1”로 정리해 보내면, 과다한 감정이 방향을 잃지 않는다.


오후 세 시를 넘기면 카페인을 닫는다.

남은 각성은 빛과 물과 걷기로.

건물 밖에서 7분만 걸어도 과다가 조금 덜 커 보인다.


창고 옆 흡연구역에서 누군가 나를 본다.

나는 라이터 대신 물병을 꺼낸다.

한 모금, 한 줄 숨, 한 걸음 뒤.

달아나는 게 아니라 거리를 만드는 중이다.


다섯 번째 회의는 외부였다.

파일명을 단정히 붙였다. 날짜-버전-핵심어.

브랜딩보다 납품, 로고보다 신뢰.

과다한 말은 제목 하나로도 절반 줄어든다.


점심은 빨리 먹지 않는다.

밥 한 공기, 국 한 모금, 단백질 한 가지.

오후의 과다는 대체로 점심의 과장에서 온다.


해가 기울수록 몸은 과다한 날의 영수증을 꺼내 든다.

어깨 결림, 목 뻣뻣함, 눈의 모래 알갱이.

나는 의자를 밀고 창가로 가서 목을 30초 돌린다.

휴식은 사치가 아니라 공임비다.


퇴근 알람이 울리면 인박스는 비지 않았다.

비워야만 퇴근하는 건 아니다.

정리해도 퇴근한다.

내일의 내가 덜 미워지도록 “첫 작업 한 줄”만 남긴다.


집으로 오는 길에 편의점을 지나친다.

달달한 무언가 대신 따뜻한 보리차를 집어 든다.

오늘의 나에겐 빠른 위로보다 오래 가는 온기가 맞다.


집에 도착해 창문을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연다.

밤공기가 거실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나는 재떨이를 싱크대에 올려 둔다.

깨끗해지는 쪽으로 하루를 기울인다.


커피잔을 씻고 물기를 턴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과다의 끝은 소란스런 회개가 아니라 작은 반복의 소리다.


노트에 짧게 적는다.

“카페인 1잔 줄임, 첫 개비 30분 미룸, 회의 네 칸 유지.”

작은 덜하기가 과다를 안쪽에서 비운다.


나는 과다한 날의 나를 싫어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과다와 거리를 만드는 쪽을 택한다.

반 박자 느리게, 한 모금 더 물로, 한 줄 더 짧게.


완벽한 절제는 내 체질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의 목표는 단순했다.

과다에서 적정으로, 적정에서 충분으로.

100에서 92로만 내려도 내일의 내가 숨을 쉰다.


불을 끄기 전, 내일의 작은 합의를 적는다.

“카페인 컷오프 15:00, 첫 개비 10:30 이후, 회의는 ‘결정-담당-기한’으로 닫기.”

유행하는 명언보다 내 생활어로 적힌 문장이 더 오래 간다.


과다인간이 적정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은 화려하지 않다.

물, 빛, 숨, 한 줄 메모.

이 네 가지가 오늘의 과다를 내일의 균형으로 바꿔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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