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Jan 28. 2016

lisianthus

 즐겨보는 영화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딱 두가지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그리고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 처럼 살아. > 어떻게 보면 그 순간만 깨닫고 넘어 갈 수 있는 말이지만 그 때에 나는 이 대사에, 이 말에 깊게도 감명을 받아 한동안 스스로에게 되뇌이기도 했었다.



 스무살과 서른의 차이를 두자면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에겐 아직도 그 때가 그 때다. 그래도 굳이 따져보자면 뺄 수없는 열살의 나이를 먹었고, 여전히 철이 안들었다는 것 외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회가 있던 날 이였다. 저마다 퇴근 후 만나는 자리라 회사원의 온기를 잔뜩 품은 채 하나 둘씩 약속 장소로 모였다. 그 중엔 결혼한 친구도, 아이가 있는 친구도 있어 자리가 빌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 쓴소리는 않았다. 대신,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이 서운 할 정도로 재밌게 놀고 보는 게 우리에겐 동창회였다.



 열명이 모여도 통제가 안되는 상황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했고, 대화의 주제가 한 쪽에서 한 쪽으로 금방 튀는 일 또한 여전했다. 안주는 줄지않고 술만 주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다들 한가닥 하는 주당들 답게 소주병이 열병에 가까워 짐에도 누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대화는 점점 짙어져갔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하려는 친구와, 이제 막 연애를 시작 한 친구, 얼마 전 헤어진 친구와, 일찍 결혼 해 살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연애가 멈춰있는 사람이였다. 돌아가며 한명씩 대화의 타겟이 되고 어느덧 내게로 쏟아진 눈빛들을 보며 나는 소주가 든 잔을 비워냈다. 너 아직이냐! 호탕스럽지만 걱정이 가득 묻어있는 B의 말에 나는 웃었고, 일제히 날 보고 있던 친구들은 하나 같이 아쉬운 소리를 냈다. 그들도 그럴것이 일년 전 연애가 끝난 후 부터 여전히 나는 혼자였기 때문이였다. 여자 소개 시켜줄까? 아홉명 중, 여섯명이 얘길하는 소개를 마다 하던 중, 나 얼마전에 K봤어. 라고 얘길하는 B에게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 중에서도 단연 내 눈이 제일 빛났을 것 이였다. K라면 나와 4년을 함께했던 연인이자 일년 반 전에 헤어진 사람이였다. 궁굼하지만 티를 낼 수 없던 나를 대신해 호들갑 떨며 궁금해하는 R의 목소리에 B는 서슴없이 얘길했다.




북촌에서 꽃집 겸 카페하더라. 여자친구랑 지나가다 봤는데 분위기 좋았어. 오픈한진 두 달 쯤 됐다 했고, 걔 원래 플로리스트 준비했잖아. 잘 어울리던데?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예쁘고 라고 얘길하던 때에 B의 눈은 정확히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다른 말 대신 눈썹을 치켜올리는 날 보며 웃던 B는 늘 그랬듯 돌려 말하는 대신 콕 찝어 나를 향해 활을 던졌다.



 " 다들 잘 지내냐고 묻더니 넌지시 너도 잘 지내냐고 묻더라. 왠지 아쉬워하던 얼굴이던데. " B의 말에 다들 환호하듯 나를 보며 웃었고, 개중엔 앞에 놓인 과자를 장난스레 내게 던지는 친구도 몇몇 있었다. 솔직한 K의 말만큼이나 솔직한 내 대답을 듣고자하는 아홉명의 눈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 끝났는데 뭐. " 아쉬운 척 않으려 깊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또한 모를 리 없는 그들이였다. " 염병하네 미친놈-! " 하필이면 사랑 앞에선 무조건 다이렉트인 그들이였기에 어줍잖은 내 말이 받아들여질린 없었다.



 " 이제와서 그럼 뭐해. 일년이나 지났는데. " 마치 늦었다고 얘길하듯 말하는 날 보며 여전히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내는 그들 사이에서 B가 아닌 P가 입을 열었다. 중간 중간 욕설이 난무했지만 누구보다 진심 어린 말로 내게 충고하던 그의 말은 이러했다.




 눈 앞에 아른거리면 찾아가보고, 아님 이제 끝내 새끼야. 근데 너 매번 말로는 아니다 하는데, 일년 반 새에 들어왔던 소개팅만 해도 몇개냐. 그럴 때 마다 너 일 핑계대면서 넘어간 거, 우리도 알면서 넘어 가 준거야. 그래도 우리 중에서 니가 제일 순정파니까. 너 혼자 잊겠다는 고집 이해해주려고. 일년 반이면 됐다. 너 올해마저 그러면 우리도 단정 지을 수 밖에 없어. 아직도 K 못 잊은 거라고.




 토시 하나 틀리지 않은 말을 들으며 나는 앞에 놓인 컵의 입술을 매만졌다. 나를 알아도 너무 잘 아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진실 된 말은 언제나 나를 돌아보게끔 했다. 사실 P의 말은 지극히 사실이였다. 그간 들어왔던 소개팅을 다른 일도 아닌 그저 회사 일이 바쁘다는 말로 핑계된것도 나였고, 그간 연애의 마음을 지우려 친구들의 적극적인 어필에도 손을 저었던 것 또한 나였다.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우리 중 제일로 유쾌한 J가 분위기를 바꾸려하며 내게 묻은 그들의 관심을 하나씩 떼어갔다.



 술에 잔뜩 취한 채 삼차를 가네마네 길바닥에서 논쟁중인 J와 P를 택시에 태워보내고, 방향이 맞는 친구들끼리 헤어지다보니 나는 B와 함께 가게 되었다. 야, 좀 걷자. B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보로 향했고, 쌀쌀한 새벽 밤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갔다.



 " 남들한텐 헤어짐의 시간으로 일년이 길진 몰라도 너한텐 짧은 거 다 알아 새끼야.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총 7년을 친구로 지내다 4년을 연애하고 서른줄이 됐는데 어떻게 안 그래? 알아 온 날로만 따지면 10년이 훌쩍 넘는구만. ‥내가 다른 놈들이면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 만나게끔 했을건데, 너니까 안 그랬던 거야. 너희니까. 이 생각은 애들도 마찬가질거고. ‥좀 잘 어울렸냐. 누가 봐도 예쁜 애들끼리 만나서 예쁘게 연애를 하는데 좀 부러웠겠냐고. 사실 나도 지금 여자친구 만나기 전에 너네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 했는데.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안 어울리는 구석이 없어서. "



 몇잔 걸친 술 덕에 B의 입에선 평소 나오지 않던 낯간지러운 말들이 마구 쏟아졌다. 나와도 절친한 사이지만, K와도 절친한 사이인 B는 누구보다도 나와 그녀 사이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내게서 듣는 내 마음만큼, 그녀에게서 듣는 그녀의 마음도 잘 알고 있으니 서슴없이 다시 만나길 바란다는 말을 건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왔다.



 " 어쩌면 모른 척 다가 와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뭐 니가 그럴리는 없겠지만, 그런다해도 걔가 널 내칠까 싶다. 분명, 겉으론 아닌 척 해도 속으론 엄청 반가워 할거야. "



 무덤덤하게 던진 말을 뒤로 달려오는 택시를 잡은 B는 나를 태우며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그 후로 아무 말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의 말은 내게 무리라는 걸 알고는 멈췄는지도 모른다. 얼마 못가 먼저 내린 B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나를 배웅했고, 나는 그의 웃음과 말을 마음에 담은채로 집에 도착했다. 술을 빌려 나온 옛 이야기에 일순간 모두의 마음이 일렁였다. 내일이면 그만 지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지만, 쉽게 잠이 올리 만무했다.



 결국 새벽을 다 지새우고서야 나는 잠에 들었고, 늦은 오후에야 잠에서 깼다. 깊게 잠이 들었음에도 눈을 뜨자마자 생각나는 어제의 잔상에 나는 누운 자리에서 긴 시간 고민을 해야만 했다. 어쩌면 모른 척 다가 와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저 B의 생각일 뿐인 말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자꾸만 내 귓가에 맴돌았다. 한참을 그 말 속에 파묻혀 있던 나는 갑작스레 몰려 온 자신감에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리곤 늘 입던 수트 대신, 클래식한 차림으로 차려입곤 집을 나섰다. 눈 앞에 아른거리면 찾아가보고 아님 이제 끝내 새끼야.



 집을 나서며 B에게 전화로 물었다. 가게 어디냐? 내 말에 잠이 묻은 목소리로 웃던 그는 정확하고도 세세하게 주소를 알려주었고, 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40분의 시간동안 수 없이 오가는 감정을 느끼며 도착 한 북촌 입구에선 나도 모르게 긴 숨을 내뱉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B가 말한 주소대로 천천히 올라가다보니 어느새 내 시야로 작은 가게가 들어섰다. 작은 공간이였지만 느껴지는 분위기엔 따듯함이 한껏 묻어났다. 멀리서 일하는 그녀를 가만 지켜보다 나서는 손님을 보며 걸음을 뗐다. 한 발 한 발 가까워질수록 바쁘게 뛰어오는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뒤돌아 있던 그녀는 작은 종소리에 반사적으로 돌아섰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 어서 오세…. "



 어쩌면 모른 척 다가 와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참 거짓말 같았다. 일년을 안 보고 살았던 사람인데, 잠깐의 순간 나는 그녀를 보며 평소 놓치고 살았던 안정감을 느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로인해 아무 말도 못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섰다.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느끼며 그만 흔들려버린 목소리로 포장을 주문했다.



 " 리시안셔스 한다발 포장해주세요. "



 내 말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녀가 살짝 웃었다. 리시안셔스, 그 꽃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꽃 이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