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구하기, 운동장 돌기, 스탠드에서 응원하기. 그 시절, 우리의 체육시간
뱅뱅 돌아가는 회전초밥은 일식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전초밥’은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을 빙빙 돌며 수다를 떠는 여학생들을 귀엽게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한국 몇 여학생들의 특징일 수도 있다.).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공학)에도 일명 회전초밥으로 불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대체로 그 아이들은 점심 시간마다 ‘소화시킬 겸 산책하자’며 운동장을 돌았는데 대체로 체육 수업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아니었다. KBS2의
‘[슬기로운 학교 생활 다시보기] 여학생들의 체육수업’에서 한 체육 선생님은 ‘(여학생들은) 움직이는 것 자체가 왜 즐거운 지를 경험해 본 적이 별로 없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공감한다. 우리에게 허용된 운동은 공을 피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피구, 남자애들이 주가 되었던 짝축구 뿐이었으니까.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농구 동아리가 있었다. 대체로 남자애들이 동아리원이었지만, 소수의 여자애들도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내 친구들도 있었는데, 운동을 좋아하는 애는 없었다. 정확히는 뛰거나 달리는 운동을 하면 다리가 두꺼워질까 봐 움직임 자체를 마냥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럼 대체 왜 농구 동아리에 들어갔던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친한 친구가 자기를 응원해 달라고 해서(어디 거창한 대회 나가는 거 아님), 좋아하는 누군가가 그 동아리에 있어서 혹은 할 게 없어서. 그들은 그렇게 ‘농구 동아리 매니저’가 되었다.
매니저들에게는 딱히 할 일이랄 게 없었다. 연습이나 경기 전 선수들을 위한 음료수를 사 스탠드에 두고, 경기가 시작하면 응원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꽤 빈번하게 스탠드에 앉아 수다를 떠는 매니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농구 동아리 부장이었던 친구에게 물었더니 자신은 농구를 하느라 그동안 매니저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 그들은 왜 매니저를 뽑는다고 했고, 또 그 친구들은 왜 매니저에 지원한 걸까. 친구의 ‘그냥 다른 학교들도 다 뽑길래’ 뽑았다고 답변을 들으니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심지어 부원들에게 필수적이었던 실기 시험은 매니저들에게는 예외였다.
친구에게 시/도 대회 하나 출전하지 않았던 농구 동아리에 매니저가 필요했던 이유는 그들도 그저 타 농구 동아리들처럼 ‘내조의 여왕들’을 얻기 위한 명분이 아니었을까 물었다. 친구는 그땐 어려서 인식하지 못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의 대답이 왜 인지 씁쓸했다. 만약 여자 애들이 잔뜩 소속된 ‘바느질 동아리’가 있었다면, 과연 그 옆에서 실과 천을 갖다 주고, 혹 손이라도 다칠까 노심초사하는 남자 애들이 매니저로 들어갔을까.
12년 동안 학교를 다닐 적,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피구보다는 공을 통통 튀기며 골대를 향해 앞로 달려가는 농구가 하고싶었다. 어릴 적 엄마, 아빠와 골을 넣으러 코트 위를 뛰어다녔던 어렴풋한 기억 덕이었으나 남자 친구들은 나를 잘 껴주지 않았고, 껴준다고 해도 깍두기 신세에 그쳤다. 남자애들보다 키가 작아서, 여자라서. 체육을 좋아하거나 운동신경이 좋은 몇 여자 애들은 남자 애들 사이에서 ‘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체육 시간마다 줄곧 깍두기이거나, 형이, 또 가끔은 나대는 애가 되었다.
반면 여자 친구들은 달랐다. 다리가 두꺼워진다고 운동을 싫어했고, 대신 가만 앉아 수다 떠는 걸 좋아했다. 승부욕이 센 나는 달리기 1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병에 걸려있었는데, 내 친구들은 다리가 1미리라도 두꺼워질까 최소한의 움직임도 하지 않으려는 병에 걸린 듯 했다. 그 세계에 소속되기 위해서 나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감춘 채 가만히 체육 시간에는 교실이나 스탠드 아래에 앉아있어야만 했다. 우리를 가만히 앉혀 둔 것은 과연 우리의 완벽히 자의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본능적으로 여자는 수다를 좋아하고 신체 활동 욕구는 떨어지는 걸까. 활동적인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여자들과 가만히 앉아 쉬기를 좋아하는 남자들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만약 그때 우리가 신나게 뛰어놀며 몸과 마음의 근력을 기르고, 땀 흘림의 즐거움을 미리 배웠다면 어땠을까.
몇 년 전, 짧은 기간 동안 캐나다에서 지낸 적이 있다. 어느 날 머물던 홈스테이 집 조카(중학생, 여자)가 자신의 농구 경기에 우리를 초대했다. 당시 마주한 체육관에서의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경기장에서 본 아이들은 키가 크든, 작든, 머리 길이가 짧든 길든, 말랐건 아니건 너나할 것 없이 농구 코트 위에서 치열하게 공을 다뤘다. 물론 실제 큰 시합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게 학교 체육 수업의 묘미다. 공교육 과목으로서 체육은 누구든 제약없이 다양한 운동을 시도해보고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뭐든 해봐야 안다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데 내가 그걸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알 방법은 없으니까.
코트 위에서 각자의 열정과 최선을 쏟아내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그들은 부딪히거나, 넘어지는 일, 삐끗 실수하는 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뿐이랴. 또 관중석 앞에서는 치어리더들이 격렬한 응원의 춤을 추며 체육관 천정을 뚫을 듯 아주 빠르고 높게 날았다. 스스로와 동료들을 믿고 행하는 몸짓들은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왜 인지 아주 견고해서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우직한 탑을 보는 듯했다.
돌아보면 오래전 그날 체육관에서 조카의 농구 경기와 치어리딩만 보고 온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다양한 선택지를 발견한 것이다. 관객과 호흡하며 믿음으로 서로를 받쳐주고 또 높이 날 것인지, 코트 위에서 골대를 향해 앞으로 달려나갈 것인지, 상대를 막고 공을 뺏어올 것인지, 동료를 서포트할 것인지. 적어도 우리에게 이렇게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사회를 꿈꾼다. 스탠드 아래에 가만히 앉아만 있기에, 다른 누군가의 수분만을 챙겨주기에 농구 코트는 꽤나 넓다. 판판한 코트에 운동화 밑창이 닿는 삐극, 툭탁 소리는 기분 좋은 긴장감을 주었고, 관객들과의 현장 커뮤니케이션은 온몸으로 활기를 흡수하기에 충분했다.
스탠드에 가만 앉아 누군가의 ‘내조의 여왕’만으로 남고 싶은 이가 있다면 우선 밖으로 나가 빙글뱅글 돌며 세상을 보기를, 바람과 햇살을 느끼기를 추천하고 싶다. 그렇게 조금 운동장이 익숙해졌다면 자신의 역할과 장소를 정할 수 있었으면 한다. 동료와의 신뢰를 타고 천장까지 날 것인지, 득점과 실점으로 통통 튀는 농구 코트 위를 달릴 것인지. 조금 더 많은 선택지가 생겨 그 안에서 내게 가장 적합한 것을 고를 수 있다면, 우리는 저마다의 세상을 조금씩 확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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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광고는 2019년을 열광시켰다. 영상의 초입부터 보아는 갓 돌을 맞은 여자 아이에게 묻는다.
"넌 어떤 사람이 될래?"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묻고싶다. 당신은 어떤 사람을 꿈꾸는가.
출처 및 참고자료
KBS [슬기로운 학교 생활 다시보기] 여학생들의 체육수업 1편
KBS [슬기로운 학교 생활 다시보기] 여학생들의 체육수업 2편
여학생 체육에 날개를 달자 / 오정훈 / 한국교육신문 / 201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