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나에게 책을 읽는 것은 시계 초침처럼 늘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다. 잠깐의 여유만 허락되어도 습관처럼 책을 열어 글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글자중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소설을 편독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인격체에 흠뻑 빠져들어 제 2의 인생을 살아보는 것 만큼 매력적인 게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외없이 유한한 일회성의 삶을 배정받는다는 사실이 늘 억울했다. 그런 나에게 책 속의 여러 주인공으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요즘은 수많은 OTT의 발전으로 스크린 너머의 매력적인 주인공들에게 빠져들기 쉬운 세상이지만, 나에겐 활자들 너머로 펼쳐지는 내 상상 속 세상들이 훨씬 더 매혹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주변 친구들처럼 이어폰을 꽂고 넷플릭스를 틀기보다는 지금도 나는 다소 아날로그스럽지만 종이책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넘기고 있다.
훌륭한 상상력을 지닌 작가님들 덕분에 초현실적인 상황에도 가끔 들어가본다. 지극히 현실적인 나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완벽하게 구축해 놓은 판타지나 환상적인 SF의 세계에 이렇게나 쉽게 빠져들 수 있다니. 내 두뇌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낸 작가님들을 동경하게 된다. 가히 천재들이다.
주기적으로 책을 사들이고 독파하는 나에게 흥미로웠던 책이란 한 둘이 아니지만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을 떠올려본다.
아밀 작가의 •멜론은 어쩌다• 는 단편 모음집인데, 그 중에서도 마지막 챕터에 삽입된 <야간산책>글은 나를 현실에서 똑 떼어다가 그 안으로 데려다 놓는 듯 했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도망치듯 들어선 어두운 공원에서 시작된다. 고요가 내려앉은 밤,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던 낯선 남자와의 만남은 주인공의 세계를 단숨에 신비롭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조건 없는 다정함과 애정을 건네는 그에게 주인공이 매혹되는 과정은 지극히 필연적이었다.
특히 밤의 공원 속에서 조각상이 생명을 얻어 연주를 시작하고,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내 눈앞에 너무나 선명하게 펼쳐졌다. 마치 나도 함께 그 옆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우리는 대부분 마음 한 편에 은밀한 도피처 하나쯤 품고 산다. 그것이 찰나의 환영일지라도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줄 완벽한 행복과 환상의 공간 말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그곳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책 안의 그 공원에 수시로 넘나들었다.
또,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책’의 배경지들은 여행지를 선택해주는 주사위가 되기도 한다.
이미 유명한 고전이지만, 눈이 내리는 바깥 풍경을 보고 있으니 절로 읽고 싶어져 택했던 가와바타의 •설국•을 말하려 한다. 작가가 배경지인 ‘니카타현 온천마을’을 온갖 환상적인 표현들로 묘사 해놓았기 때문에 내가 그 곳을 다음 여행 장소로 선택 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그 곳에서 별이 쏟아지는 몽환적인 장면은 나를 매료시켰고 이들이 겪은 황홀함을 내가 직접 느끼고 경탄하고 싶었다.
그렇게 <설국>은 주인공들로서 한 번, 나를 통해 한 번 더 생명을 얻게 된다.
때로는 그 곳이 허구인 세상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어도, 인물들의 감정에 깊게 이입되어 이런 슬픔을 경험해 본 적이 있나 할 정도로 눈물을 왈칵 쏟기도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일 경우에는 내 동공에 이렇게 많은 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무너지기도 한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슬픈 책이 뭐였는지 묻는다면 일초의 고민도 없이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될 때•를 추천한다. 자서전이었음을 모르고 읽었을 때의 슬픔이 몇 배는 더 효력을 보이겠지만, 알고 본다해도 슬프다. 젊은 나이에 암 말기를 진단받은 의사의 죽음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은 자전적인 책이다. 누구보다 삶의 생과 죽음에 가까이 있던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 하는 모습들이 너무 용감해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내가 아닌 누군가의 소중한 글을 통해서 여러 인생을 경험한다는 것은, 세상이 우리 모두에게 이용을 허락한 유일한 마법이라 생각한다. <현실의 인생에서 잠시나마 나를 구출하고 책 안의 세계로 집어넣기>는 요즘 나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현생을 조금 더 가볍게 여길 수 있을 지 모른다.
가끔은 우리도 도망칠 곳이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