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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에 대처하는 교사의 자세

# 나이스한 교사인 척, 속으론 욱 ep.7

by 사랑의 생존자

※ 이 글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에세이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여러 사례를 종합해 재구성한 가상의 인물입니다.

※ 이번 화는 3편 <분노한 학부모 앞에서 살아남는 법>의 학생편입니다. 먼저 보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_^)



“아, 씨발! 그냥 좀 두라고요!!!”


오전 10시.

욕설과 함께 터진 소리에 고요하던 교실 공기가

쩍— 하고 갈라졌다.

교실 앞에 서 있던 나를 향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태섭이가

숨을 씩씩 몰아쉬며 노려본다.


아이들은 눈만 동그래진 채,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그런 우리 둘을 번갈아 본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얼어붙은 나는

5분 전 상황을 되감는다.




지루한 수업에 졸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엎드려 퍼질러 자는 아이를 못 본 척 지나치는 건 기분 문제가 아니라 교사로서의 양심 문제다.


“태섭아, 일어나자~”


수업을 잠시 멈추고 살포시 아이를 부른다.

하지만 요지부동,

태섭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2차 시도.

단전에 살짝 힘을 주어 “일어나!” 하고 외치니 그제야 아이가 부스스 고개를 든다.


그래, 일어난 게 어디냐.


작게 새어 나온 한숨을 삼키며

칠판 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바로 그 순간—


쾅!!!

책상을 발로 차는 소리가 교실 바닥을 세차게 울렸다.


헝클어진 책상,

바닥에 나뒹구는 교과서,

그리고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나를 정면으로 쏘아보는 태섭이의 이글거리는 눈.


폭발 직전의 기운이 번뜩이는 녀석의 기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조용히 되물었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아, 왜 깨우냐고요!”


“왜 깨우냐니, 지금 엄연히 수업 시—”


“아, 씨발! 그냥 좀 두라고요!!!”


또렷한 욕설이

교실 한복판을 가르며 곧장 나에게 꽂혔다.

오전 첫 수업에 맞기엔 너무 과한 폭격이었다.




이건 어디서 들은 ‘썰’이 아니다.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이다.

10년을 교단에 서면서 딱 두 번뿐이었으니

흔한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과 시간을 쌓다 보면 언젠가는 마주칠 법한 사건이기도 하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를 이끈다거나

사람을 제압하는 경험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앞장서길 좋아하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다.

한마디로,

애초에 ‘리더십’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그런데 교실 앞에 서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교사는 ‘리더’라는 역할을 부여받는 자리였고, 상대는 하루에도 열두 번 감정이 널뛰기하는 사춘기 중학생들이었다.

처음 담임을 맡았을 때의 당혹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 스무 명 넘는 외계 생명체들을 맡으라고?


…라고 경악하던 내가,

어찌어찌 버티다 보니 어느새

10년째 아이들과 제법 잘 지내고 있으니

세상일은 참 모를 일이다.




학생에게 “씨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솟구치는 충동은 맞받아치기다.

수업 중에 퍼질러 자는 아이를 깨웠을 뿐인데

돌아오는 게 욕이라니.


‘감히 선생님한테 욕을 해?’

‘그 무례한 태도는 또 뭐야?’

이런 말들이 혀끝까지 차오른다.


태섭이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고, 지켜보는 아이들에게도 ‘나는 그렇게 만만한 교사가 아니다’라는 걸 확실히 각인시켜주고 싶은 욕구가 끓어오른다.


하지만,

경험상 이럴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게

바로 그 충동이다.


교사가 흥분해 감정대로 맞불을 놓는 순간,

아이들 눈에는 이렇게 비친다.

‘어? 선생님도 우리처럼 감정 조절이 안 되네?’


십대 아이들은 어른보다 동물적 감각이 또렷하다.

강자와 약자를 본능적으로 구분한다.

가끔 철이 든 몇몇은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 분노를 있는 대로 쏟아내며 큰소리를 치는 교사는 그저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약자'일 뿐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사춘기 호르몬의 난동을 단숨에 잠재울 만큼

타고난 카리스마를 장착한 몇몇 교사들.

그들의 한마디는 번개처럼 떨어지고

아이들은 단박에 조용해진다.


하지만 나처럼

웬만한 중학생 여자애보다 작은 키에,

식당에서 컴플레인 하나 제대로 못 거는 소심한 인간은 그런 방법으론 어림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감정을 꽉 붙잡고 차분함을 보여주는 것.


물론 그게 말처럼 쉽진 않다.

그래서 내가 쓰는 작은 치트키가 있으니

이름하여, ‘감탄 모드’의 활성화이다.




시선을 살짝만 바꿔보면,

태섭이의 행동은 사실 어른들의 세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진기한 장면이다. 욕의 대상이 ‘나’라는 사실만 잠시 잊어버리면, 감탄할 포인트는 차고 넘친다.


‘뒷일 따윈 생각하지 않는 저 대담함!’

‘감정을 날것으로 그대로 드러내는 저 용기!’

‘스스로 얼굴에 침 뱉고도 고개조차 숙이지 않는 저 기세!’



뇌는 “하지 마”라는 명령을 의외로 잘 받아들이질 못한다. 화내지 말자고 되뇌일수록 오히려 감정은 더 달아오른다. 하지만 감탄 모드를 켜는 순간, ‘참아야지’라는 회로 대신 아예 다른 시스템이 작동한다. 시선이 바뀌고, 상황을 잠시 남의 일처럼 관찰할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탄하는 동안 교사는 침묵한다.
이게 강력한 효과를 낸다.


화를 내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말을 곧바로 꺼내지도 않는 교사.


욕을 뱉은 아이도,

지켜보는 다른 아이들도

물음표를 머리에 띄운 채 나를 바라본다.


침묵이 충분히 무르익었다 싶을 때,

나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뗀다.


“씨발…”


순간,

공기가 한 번 더 얼어붙는다.


‘지금… 선생님이 욕한 거야?’

아이들의 눈동자가 사방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방금까지 씩씩대던 태섭이조차 몸을 굳힌다.


그럼 나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준비해둔 대사를 꺼낸다.


“…라는 말은 교실에서 쓰기엔 적절하지 않구나, 태섭아.”


부드럽게 미소까지 섞으며 다음 말을 이어나간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진도를 나가는 거지.

교과서 17페이지 펴고…”


그 한마디로 교실의 중심축은 다시 ‘수업’으로 돌아온다.


‘와, 이런 상황에서 그냥 수업을 한다고?’

‘오늘 수업은 날아가는 거 아니었어?’

몇몇 아이들의 김 빠진 표정이 스치며, 팽팽했던 긴장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태섭이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다.

분노를 폭풍처럼 쏟아내도 받아주는 이가 없으면,

그 잔해는 결국 고스란히 자기 몫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조용히 교과서를 펴는 친구들,

아무 일 없다는 듯 수업을 이어가는 교사.


갈 곳을 잃은 분노는 민망함으로 바뀌고, 자존심이 상한 태섭이는 다시 엎드려 ‘자는 척’을 한다. 그것이 그 아이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방어 태세다. 그러니 굳이 거기서 한 번 더 건드릴 필요는 없다.

나는 나긋하게 한마디만 남긴다.


“송태섭은 이 시간 끝나고 교무실에서 따로 보자.”




쉬는 시간,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문 채, 쭈뼛쭈뼛 걸어 들어온 태섭이를 교무실 책상 앞에 세운 지금부터가

사실상 본 게임이다.


첫 질문은 늘 같다.


“뭘 잘못했냐?”


굳이 다정하게 말하지 않는다.

되도록 짧고, 건조하게.


훈육에서 흔히 하는 실수가 있다면, 아이를 불러놓자마자 장황하고 훌륭한 ‘훈화 말씀’을 쏟아붓는 것이다.

하지만 내 경험상 그 방식은 10대 남자아이들에게 거의 먹히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리 논리적이고 멋진 말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 데 천부적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태섭이는 순간 멈칫하더니,

한쪽 눈을 찡그린 채 대답한다.


“…욕한 거요?”


“또?”


“…교과서 던진 거요?”


“또?”


“…모르겠는데요.”


여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하다.

언뜻 성의 없는 대답처럼 들리지만 굳이 화낼 필요 없다. 핵심은 아이 입에서 ‘잘못한 내용’을 스스로 꺼냈다는 사실이다.


“좋아. 그럼 네가 잘못한 거, 합해서 말해봐.”


“…욕한 거랑 교과서 던진 거요.”


“잘못했지?”


“…네.”


“그럼 사과해.”


“…죄송합니다.”


남자아이들은 납득하지 않는 잘못에 대해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걸 남이 논리로 설득하려 들면 품도 많이 들고, 반발도 크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자기 입으로 스스로 말한 잘못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 순순히 “죄송합니다”를 내뱉는것이다.

잠깐,

‘뭘 잘못했냐’고 물어서 답한 것뿐인데 그게 어떻게 ‘잘못의 인정’이 되냐고? 그게… 진짜 그렇다. 남자아이들의 머릿속은 상상 이상으로 단순하다. (주의: 이 질문은 여자아이에게 쓰면 역효과다!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사과까지 들었다면, 그 다음은 더 간단하다.


“좋아. 가봐.”


“…그냥 가요?”


“어. 가.”


질질 끌지 않고

깔끔하게 보내주는 것.


남자아이들에게는 따뜻한 10분짜리 설교보다 별 감흥 없이 보내주는 쿨함이 더 큰 호감을 준다. 혼내는데 무슨 호감타령이냐고 물을수있지만, 학생과 교사의 관계에서 ‘호감’은 훈육이 스며들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적어도 적대감은 들게하면 안된다.


물론 이 한 번으로 태섭이가 개과천선할 거라는 환상은 버려야한다.

또 욕을 할 수도 있고,

책상을 발로 찰 수도 있다.


그럼 그땐 어떻게 하느냐고?

똑같이 한다.

다시 한다.

그리고 또 한다.


남자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건 '귀찮은 것',

그리고 가장 무서워하는 건

'귀찮은 걸 지독하게 반복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면

아이는 어느 순간 생각한다.

‘저 선생한테 걸리면 진짜 귀찮구나.’

그리고 조금씩 방향을 틀며 행동을 교정한다.


물론 아주 드물게 정말로 바뀌지 않는 아이도 있다.

그 아이들은 내 능력 밖의 존재들—

오은영 박사님 같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그쯤 되면 뭐,

깔끔하게 포기하면 된다.

손바닥을 탁탁 털며.




자, 여기까지는 태섭이 이야기였다.

그런데 만약,

주인공이 '태섭'이가 아니라 '태순이'라면?

대응은 완전히 달라진다.


남자아이에게 짧고 반복적이며 귀찮게 하는 방식이 통한다면, 여자아이에게는 섬세하게 공들인 한 번의 대화가 훨씬 효과적이다.


그러니 첫 질문부터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혹시 요즘 무슨 일 있었니?”


십대 여자아이가 교실 한복판에서 감정을 폭발시킬 때는 대개 그 뒤에 무거운 일이 숨어 있다.

가족, 친구, 연애, 공부—

그 고민의 깊이는 어른 못지않다.


“평소라면 니가 절대 그럴 친구가 아닌데,

분명 속상한 일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그 말 한마디에

태순이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풀리고,

조심스레 고민보따리를 풀어내기 시작한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아이의 눈빛은 확실히 조금 부드러워져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안의 다정함을 최대한 끌어올려 말을 잇는다.


“선생님이 관심 없는 친구였으면

애초에 깨우지도 않았을 거야.

태순이를 아끼다 보니

안타까워서 깨운 거거든.”


“…네.”


‘딩동댕동—’


공들인 대화이니만큼 금세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나는 서랍에서 작은 초콜릿을 하나 꺼내 아이 손에 쥐어주며 말한다.


“다음 쉬는 시간에 조금 더 얘기할 수 있겠니?”


그러면 열에 아홉은 기꺼이 다시 찾아온다. 남자아이에게 ‘더 이야기하자’는 말은 형벌에 가깝지만, 여자아이에게 ‘다음에 더 이야기하자’는 말은 “너는 나에게 특별해”라는 호감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다시 찾아왔다면

그때서야 차분히 설명한다.

‘왜 그 행동이 문제였는지’,

‘그때 선생님의 마음이 어땠는지’.

설명이 조금 장황해도 아이는 조용히 듣는다. 그리고 작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운이 좋다면 다음 수업부터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교과서를 펴고 내 말을 열심히 듣는 태순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같은 잘못을 두고

이게 무슨 남녀차별이냐 할 수도 있지만—


여자아이들은 한 번 관계의 방향을 잘 잡아두면 웬만하면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대신 한 번 어긋난 관계는 되돌리기 참 어렵다.


반면에 남자아이들은 오늘 혼나고도 바로 “선생님, 급식 완전 존맛!” 하고 들어오는 부류다. 하지만 ‘한 번 말했으니 알아듣겠지’라는 기대는 교사의 정신건강만 해친다.




문득, 머리를 긁적이며 얼떨결에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까지 하고 간 태섭이가 문득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학생들과의 언쟁이나 다툼은 피곤하지만,

사실 진짜 에너지를 잡아먹는 건,

그 뒤에 이어지는 후속 작업들이다.


그래도 그 과정을 통과하는 동안 아이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조금씩 자란다.

아이들만 그러겠는가.

나 역시 해마다 아이들 덕에 배우고, 자란다.


(참고로 남자아이 다루는 법은…

남편 다루는 데에도 꽤 쓸모 있었다.)






에필로그.


그 후로 다행히도 태섭이가 수업 시간에 책상을 걷어차거나 욕을 내뱉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가끔은 수업을 들으려는 시늉까지 보였다. 그래봤자 겨우 십 분 남짓이었지만, 적어도 엎드려 대놓고 자는 모습은 사라졌다.


어느 날, 복도를 걷다 우연히 마주친 태섭이를 불러 세웠다.


“야, 너 요즘 안 자더라?”


나는 슬며시 웃으며 주머니 속 초콜릿 하나를 꺼내 쥐어주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태섭이는 —


“야, 일타강사 나가신다! 길 비켜!

샘!! 샘이 설민석보다 천 배 잘 가르쳐요!!”


…라며

내 팬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수업 시간에 십 분 이상 버티지는 못했지만, 태섭이 나름의 호감 표현이리라.


“샘! 샘 서울대 나오셨죠? 야, 역사샘 서울대래!”


“아니야, 태섭아. 선생님 서울대 아니야.”


“…그럼 카이스트!?”


카이스트에는 역사 전공이 없단다.

라는 말은 그냥 삼켰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 순수하고, 날것 그대로의 호감이 고맙기만 했다.


“아니야. 카이스트도 아니야.

그냥 서울에 있는 평범한 대학…”


“아, 샘! 그럼 하버드?

야 — 역사샘 하버드 나왔대!!

존나 멋있다!!”


복도를 쩌렁거리게 울리는 유언비어에

결국 나는 오늘도 소리를 지르고 만다.


“야! 송태섭! 복도에서 조용히 안 해!?

헛소리 계속할래?!!”


오늘도 나이스한 교사인 척,

속으론 욱 하는

나의 학교생활 이상무—


…인 거 맞겠지?






덧글.

비상! 비상!

오늘로 313일 된 저희 아들,
낮잠을 폐업하고 밤잠도 파업했습니다!!


잠을 쪼개 글을 쓰기엔
잠이 너무 달콤한 ‘사랑의 생존자’는
화요일 주 1회 연재라는 원대한 계획을 내려놓고

완성되는 날 = 게시되는 날
방식으로 조용히 전환합니다.^^


지난번에 갑작스런 농땡이 선언에도

따뜻한 말로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은 첫눈이 듬뿍 내렸다지요?
제가 사는 곳은 아직입니다.

저도 첫눈 기다리며…
지금은 눈꺼풀과 겨루는 중입니다.ㅎㅎ


이불 밖 바람은 매서우니,
꼭 감싸안고—

감기만큼은 문전박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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