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2년 1월 25일 늦은 오후 꽃향기가 가득한 화원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부모님은 내게 넉넉한 사랑을 주셨다. 두 분께서는 작은 꽃집을 운영하셨는데, 성실했던 탓에 많이 바쁘셨나 보다. 일에 집중하고 계실 때면 혼자 엉금엉금 기어 구석에서 잠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시거나 의자나 선반 같은 곳에 기어 올라가 떨어져 우는 날 보고 놀란 적이 잦으셨다고 했다.
좌측이 내동생/ 위가 내동생
1월생이라 유치원을 1년 빨리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입학 시기가 되어 나는 7살에 1학년으로 입학을 했다. 입학한 지 한두 달쯤 지났을까 담임선생님께서 부모님을 부르셨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신체가 작고 연약하여 1년을 쉬고 8살에 다시 1학년으로 입학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이런 글귀는 책을 읽는 내내 간간히 등잘할 예정이다.
그렇게 나는 유치원 때 친구들은 1991년생, 초등학교 이후의 친구들은 1992년생으로 나이가 들어 친구들을 만날 때 재미있던 이야기가 참 많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내 키는 145를 어렵게 넘었다. 내가 자라나는 동안 아버지의 직업이 바뀌면서 이사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정이 들 때쯤 헤어졌다. 그리고 또 이사를 가고 적응하고 헤어지고를 9번 반복했다.
작은 아이
도시에서 지방으로 이사를 가면 표준말을 쓴다고 시비를 걸었고, 지방에서 도시로 이사를 가면 사투리를 쓴다고 시비를 걸었다. 참 힘들고 어려운 학교생활이었지만 내 옆에는 든든한 내 동생이 함께 했다. 한 살 터울의 내 동생은 외향적이거나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내가 곤경에 처할 때면 나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거나, 괴롭히는 아이들과 싸울 때 힘이 되어줬다
학생캠프 참가중 왼쪽 맨 앞
그렇게 작은 아이는 스스로를 지키여 한다는 마음으로 힘을 키우기 위해 운동을 열심히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육상부에 들어갔다. 선배들에게도 맞았고 선생님에게도 맞았다. 마음껏 운동이 하고 싶었지만 눈치 보고, 더러운 경쟁에서 이기는데 집착하느라 나는 흥미를 잃고 있었다.
중학교를 입학할 때는 흔히 말하는 식스팩과 작은 갑빠도 나왔으니 내가 얼마나 악착같이 운동을 했는지 알 것이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마주치는 불량한 학생들과 늘 새로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압박감 속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친구, 선배, 후배들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늘 1:1의 승부가 아니였다. 작은아이대 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