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必死卽生)

아산 현충사-충무공 묘소

by 써니톰


대학동기가 call 했다. 아니 내가 보고 싶어 내려간 길이다.

며칠 전 전화가 왔다

이충무공 묘소 알고 있느냐?

아산 현충사에 같이 있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현충사만 보고가지, 묘소는 잘 몰라 안 간다고 했다. 나는 현충사도 가 본 지 오래라 가물가물 한데, 묘소라. 호기심이 가득하다. 그래 가자.


그 친구는 대학 같은 과 동기로 4년을 같이 공부했고, RT훈련도 같이하여 졸업 후 포병장교로 근무했다.

난 전방 1군단 포병, 그 친구는 5.18 때 그 유명한 광주 31사단 근무로 계엄군이지만 시내 파견은 나가지 않고 부대 경계 근무만 했다.


1975년 대학입학 후 그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공주에서 대학 1학년 때 어찌하여 둘이서 아산만 방조제를 간 것이다. 그 방조제는 우리나라 최초로 바다를 막은 담수화이다. 농지확장과 농업용수 확보이다.

길도 험하고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 버스를 물어 물어 타다. 방조제 입구 충남 쪽에서 걸어 북쪽으로 제방을 지나 경기도로 접어들었다.

지금 보니 평택 현덕면 계두봉(44.1m) 아래 권관항이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근처 주민 아주머니 두 분이 싸운다. 아마 패류 분배 때문인 것 같다. 한 아줌마가 떠나니 다른 아줌마가 욕을 냅다 한다. 저 여자가 전라도 아줌마라 그런다고 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우리는 멀리서 지켜보던 때인데 갑자기 내 친구 J가 뛰쳐나가더니 여기 내 전라도 친구가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그 아줌마한테 소리 지르며 싸울 기세이다.

다혈질이던 그 친구, 청년기백을 발휘하여 불의를 못 보던 시절이었다.

"야, 나는 가만있는데 왜 네가 나서냐. 두 아줌마가 싸우는데 왜 네가 끼어드냐. 화가 나면 무슨 말을 못 하냐?"하고 내가 오히려 그 친구를 달랬다.


얼마 후 호반을 구경하고 있는데 언덕 쪽에서 묘령의 아가씨가 우리한테 다가왔다.

듣고 보니 서울이 집인데 집에 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얼마 꿔달라고 한다. 얼굴이 도시 수돗물을 먹어서인지 하얗다. 몸이 좀 아픈 것 같았다. 요양인지 휴가인지 내려왔다고 했다. 나는 친구 따라와서 돈이 없다. 친구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 아가씨한테 몇 가지를 더 묻고 이야기하였다.

상습적으로 하는 그런 사기꾼은 같지 않다며 그냥 잃어버린 셈 치고 좀 도와주자고 내가 이야기했다. 당시 사오천 원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학생에게는 큰돈이다. 월 하숙비가 만원 정도였으니 지금 화폐가치론 20~30만 원 금액일 것이다.

그냥 없는 셈 치고 도와주자고 했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집에 가면 돈 보내준다고 친구 주소를 달라고 했다.

대학과 과 주소를 적어주었다. 차림새로 보니 서울아가씨로 그리 없어 보이지도 않고 우리가 20세이니 1~2살 위로 보였다. 우리가 준 돈으로 아마 수원이나 평택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갔을 것이다. 이 묘령의 아가씨와 헤어지고 돈을 보내면 좋고 안 보내도 어쩔 수 없다며 씁쓸한 마음으로 우리는 다시 제방을 걸어 남쪽 충남 쪽으로 왔다. 당시 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시골에서 공부 좀 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수업료가 면제된 국립사범대를 입학한 첫 해였다.


기다리던 버스로 타고 친구 집에 가기 위해 온양읍에 오니 날이 어둑해져서 그의 집, 아산 선장면 신장리(토막사) 가는 막차 버스가 놓친 것이다. 그런데 이제 택시를 타고 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 그 아가씨한테 있는 돈을 다 주었으니?


야 친구야. 택시를 타고 가서 집에서 준다고 기사에게 이야기해 보자. 그렇게 사정해서 택시를 잡고 어둠을 뚫고 집 근처에 내려 그는 집에 가고 난 담보(?)로 택시 옆에 있었다.

어두운 밤이고 초행이라 어디가 어딘지 잘 안 보인다. 한참 동안 기다리니 친구가 와서 택시기사에게 돈을 주어 보냈다.

집에 가서 친구 어머니를 뵙고 인사드리고 밥을 얻어먹었을 것이다.

외딴집이었고 어느 항아리에서 감을 꺼내 주어 먹었다. 아마 떫은 감을 항아리에 두면 익어 먹기 좋게 숙성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중에 공주의 학교로 돌아와 바쁜 대학 생활로 그 묘령의 아가씨 건을 잊고 있다가 한참 후에 친구한테 꿔준 돈이 왔다고 했다. 아마 우체국 전신환으로 왔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내가 생생하게 이야기하니 아산방조제는 기억나나 아마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나는 고등학교 이과라서 암기보다 이해력이 빠르다.

그런데 여행의 추억은 잘 잊지 않는다. 아마 새로움이 뇌에 그림으로 각인되어서 일 것이다.


하여튼 오늘은 6.25. 75주년. 온양온천역에서 만나 친구 고향집 토막사에 들려 텃밭도 보고 lp판도 들었다.

나의 조국, 시벨리우스,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 등.

그 친구는 70년대 대학시절 lp판을 수집하여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는 애호가였다. 테이블에 도는 바늘이 몇 십만 하는 고가라고 한다. 나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수백 곡을 저장하여 음악파일로 듣는 USB시대가 아닌가?


차를 마시고 음악 듣고 끝없는 옛날이야기로 담소하다가 친구는 옛날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를 보여준다. 초등학교는 가, 나, 다 중 전부가 '가'이고 시골 중학교이지만 전교에 1등이다. 187명 중 3년간 1등으로 우등상을 받았다. 본인 스스로가 공부 잘했다고 한다.


우리는 차를 몰고 이순신장군 묘소로 향했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참배했다. 국가와 민족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현충사를 찾아 사당을 알현하고 활터, 고택, 전시관, 연못도 오랜만에 찾았다.


전시관에 가니 충무공을 모신 전국 사당을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내 고향 해남에 오충사(용정사)에도 임진왜란 시 순직한 의병장 나의 직계 조상 이 계년(桂年)도 충무공과 함께 5분이 모신 사당이 있다. 계년은 왜란시 진주성싸움에서 김시민장군과 함께 순직한 의병장이다. 몇 해 전 진주박물관에서 발간된 전쟁사 책에서도 학예사로부터 확인하였다. 조상 이름을 현충사에서 보니 더 가문의 영광이다. 우리 집은 해남차파 종갓집으로 선조대왕으로 받은 무과급제 교지(敎旨)도 있었는데, 잊어버려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1980년대 초반일 것이다. 후손을 잘 두어야 한다.


6.25지만 평일이고 비가 내려서인지 찾는 이가 없어 더 고즈넉하다 못해 쓸쓸하다. 주말이면 많은 사람이 오겠지 하고 위로하면서 물러나왔다.


먼 길 가려면 이른 저녁밥이라도 먹고 가라면 역 근처 설렁탕 집에서 쌀밥에 뜨근한 국물로 배 채웠다. 전철을 타니 탑승대기실 platform까지 같이 들어와 전철 문에서 배웅한다. 감동은 사소한 정성으로 이루어진다. 따뜻한 친구의 가슴을 안고오니 두 시간도 멀지 않다.

영등포 집에 오니 밤 9시가 넘었다. 고맙고 감사하다, 집에 왔다고 카톡을 넣으니 벌써 동행한 사진이 먼저 와 있다.


친구야. 우리 오래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중등학교 교장으로 모범생으로 살아서인지 환한 너의 얼굴이 벌써 그립다. 근명간 서울에서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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