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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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지내던 말이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만난 H가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나는 원래부터가 확률에 상관없이 마음이 가는 대로 걸고 보는 사람이다.
무모하다고 해도 무조건 앞으로만 가는 사람.
뒤를 보고서 뒷걸음질 치다보니 앞으로 가버리는 사람.
그랬다.
불현듯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하천이었다. 하천 다리 밑,
내가 좋아하는 아지트였고 우리는 물을 바라보며 바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던가. 아니면 그 하천 다리를 건너며 건넸던가. 여튼 검은 물에 비치는 네온사인불빛은 아름다웠고 그 날 무엇에 대해 말하다가 나온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다만 내 기분에 대해서만 중요했다. 글쎄, C에 대한 얘기였겠지. C에 대한 얘기를 하는 나에 대한 너의 질투였겠지. 나는 너를 이기고 싶었어. 너를 이기면 너를 포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탐이나는 보석은 아니었으나 기왕 룰렛판에 앉았다면 뭐라도 걸리는 게 기분 좋잖아. 그게 그때의 마음이었다고. "그쪽도 언젠가 나 때문에 이 하천 물이 불어날 정도로 울어야 할 순간이 올 거예요." 너는 반발하듯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그랬지. 그때 나의 대답은 "나는 지는 게임엔 배팅 안 해요." 였다.
지나치며 했던 말인데 그게 퍽 인상깊었는 지 해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너는 내 앞에서 그 말을 꺼냈다. 그 말을 기억하냐고. 자신도 그 말을 믿으며 살아왔다고.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지는 게임엔 배팅'하지 않는다던 나라면 어떻게 결정했을 지 따져가며 왔다고. 그리고 언제나 내가 옳았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너는 나보다도 더 내가 한 말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그냥 당시에는 내 기분이 그랬어." 라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네 믿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나의 체면을 위한 결정. "그래. 내가 맞다니까." 그러고서 픽 한번 웃어버릴 뿐.
사실 게임이라기엔 너무 쉬웠다. 너는 이미 내게 푹 빠져버린 사람이라 손댈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나의 기분이 그랬던 거니까. 자기 팬을 열광시키기 위해서 한 번 던져보는 멘트같은 것 뿐이었다. 너는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며 두손을 맞잡을 나를 기대한 게 아니라 너를 세계에 들이지 않으면서도 너가 따라올 수 있도록 거리를 주던 나를 좋아했던 거잖니. 그러니 고백할게. 나는 지는 게임에 배팅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게임에서 나는 승자였고 내가 너를 철저히 이긴 게임이라는 걸 한번 더 상기시켜주는 말이었다는 걸. 너를 사랑하기 직전에 사랑하게 될까봐 뱉어보는 자기 암시 같은 거였다는 걸.
지나고나면 사람이, 삶이 또 현혹이라는 것이 참 시시하지 않니.
그리고 더불어 다시 만난 날 너는 고통을 겨루는 것이 문학이라는 말도 했었다. "이런 말 하면 너가 화낼 수도 있는데 너무 궁금해서 물어볼게. 언젠가 문학은 고통을 겨루는 것이라는 말을 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제 그 고통을 청산하게 되면 너는 무엇을 쓸 거야?" 거기에 나는, "행복하게 글 쓰는 사람들도 많더라." 정도로 심드렁하게 대답했고 너는 "그래." 정도로 심심하게 대화를 닫았다. 그게 좀 섭섭해서 "아마 전 같은 글은 아니겠지." 정도로 내가 다시 대화 문을 열었고 너는 "그렇겠구나." 했다.
그래 꽤 예리한 지적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시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시도, 소설도, 희곡도, 심지어 일기까지도.
나는 고통이 문학을 이룬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나의 글들은 항상 극한에서 태어났었다. 감정의 과잉을 누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감정의 과잉이 글을 쓰기 위한 수단이 된 적은 없었어. 그러니 괜찮을 수도 있고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이 전과 같은 글은 아니게 될 테지. 이것만큼은 사실이다.
뒷걸음질을 치다보니 어느새 남들보다 앞서가고 있더라. 이게 내가 지금까지 글을 잡고 살아온 배경이었다. 근데 앞으로도 완전히 똑바로 앞을 보지는 못할 것 같아. 그게 무엇인지를 한창 자라던 시절에 배우지 못했으니까. 문득 스무살에 했었을 그 말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나는 지는 게임에는 배팅 안 해요." 대충봐도 허세가 가득한 어린이의 말인데 어쩌자고 너는 거기에 코가 꿰어 나를 더욱 사랑했을까. 나의 어림과 너의 어림이 참 절묘한 인연이었다. 너무 귀여워서 몇 번 더 발음해 본다. "나는 지는 게임에는 배팅 안 해요." "나는..."
앞으로 나는 애도가 가득한 글들을 쓰게 될 것이다. 내가 지나온 것들이 순차적이지 않게 아주 뒤죽박죽으로 열거될 것이다. 주로 사람일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반드시 나를 떠났거나 떠날 예정이므로 나는 그 때마다 청산이니 관조니 애도니 해가며 여기 들어 앉아 있을 작정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사랑했던 나의 시절들을 여기에 칸칸히 박아넣고 합장할 것이다. 청산하겠다고 종량제 봉투에 바리바리 담아 어느 냄새나는 매립장에 던져 놓고 불을 질러 버리는 게 아니라, 여기에 둘둘 풀어서 돌돌 말아 놓을 셈이라고.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첫 글로 정한 이유다. H, 네가 나를 쓰게 했다.
참 재밌는 말이다 그나저나.
나는 지는 게임에는 배팅 안 해요.
어리석고 귀여운 캐릭터를 쓸 때 꼭 대사로 써 넣고 싶다. 내가 생각해낸 말이지만 귀여워. 웃음이 난다. 봄날의 쌀쌀한 강바람을 맞으며 가엾게 떨고 있으면서 애써 떨리는 어깨를 감추려 가슴을 한껏 내보이며 한 자 한 자 눌러 말하는, 표정을 들킬 까봐 살짝 고개를 비트는, 눈빛이 철저하지 못할까봐 의도한 듯 눈을 흘기는, 강해 보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그날의 어린아이를 본다.
*
그 아이를 그때 더 많이 사랑하고 안아주었어야 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때 그 아이를 물가에서 건져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억해주는 것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