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퇴사
10년 전, 나는 회사의 팀장이었다. 그때 나름 회사의 인정을 받으며 더 좋은 자리로 (물론 회사 입장에서의 ‘좋은’이지, 개인에게는 더 ‘빡센’으로 표현될 곳으로) 이동하게 될 상황이었다. 갑작스러웠다. 회사의 일방적인 통보로 주말이 지나고 3일 후면 나는 이동을 해야 했다. "너무 잘 됐다"라는 주변의 축하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지금인가?
퇴사가 떠올랐다.
사실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모른척하고 지냈지만 더 이상 이 회사에서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앞으로 10년 후에도 같은 일을 (만족하며) 할 수 있을까? 그 후의 10년 후에도 (체력적으로) 할 수 있을까?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왜 지금의 연봉은 만족스럽지 않지? 나의 선배들의 모습은 미래의 내가 꿈꾸는 모습인가?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유럽 여행을 갈 수 있지?
바로 회사에 퇴사 결정을 통보했다. 3일간의 고민으로 내린 결정이라 하기엔 내 뜻은 꽤나 완강했고 회사는 나를 설득하기에 실패했다.
그렇게 퇴사를 앞둔 마지막 미팅 날이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아쉽지만 각자의 길을 가게 될 서로에게 '그동안 고생했다' 노고를 위로하며 밝은 미래를 응원하는 훈훈한 날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미팅이 진행될수록 느껴지는 냉정함 속에 그날의 일정 플랜에 저녁식사 자리가 없다는 걸 발견했다. (보통 누군가가 퇴사를 하면 저녁식사 자리가 마련되고 소소하게나마 송별회를 갖던 회사였다)
'그래, 회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퇴사하는 직원이 뭐가 예쁘겠어. 점심 먹으면서 간단히 인사하면 되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왔고
먹었고
다시 미팅이 진행됐고
마쳤고
그저 그렇게 회사를 나오는 순간
지난 몇 년 간 쌓아 올린 노력과 관계가 무색해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 하다,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하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정말 이대로 집으로 가도 되는지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을 시작해 오래 동고동락한 회사였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마지막 인사는 할 줄 알았는데 그날 회사는 퇴사하는 내가 밉지만 일은 시켜야 하니 마지막까지 대면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로 으쌰으쌰 하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바로 이렇게 태세 전환할 줄이야.(회사 입장에서는 내가 그렇게 느껴졌을까) 직원 개인의 고통은 말 그대로 개인이 감수해야 했고, 회사 밖 직원의 미래는 어두워야 했다. 그저 조직에 맞는 모양으로, 조직이 원하는 곳에서 잘 굴러가야 하는데, 떠난다니? 더 이상 인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친했던 동료 몇몇과 회사 근처 치킨집에서 조촐한 송별회 자리를 가졌다. 저녁이라 하기엔 어중간한 시간이라 조명을 꺼둔 어두컴컴한 치킨집 안에는 사람도 없고 고요했다. 지난날을 회고하고 넋두리를 늘어놓기에 알맞은 어둠과 이 복잡한 감정을 쏟아내기에 적당히 메마른 테이블이 마음에 들었다.
"너희는 퇴사할 때 절대 솔직하지 마. 무조건 다른 핑계를 대. 나처럼 솔직하게 퇴사하면 이런 취급받는다."
그날 어떻게 집에 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배신감과 허탈함이 가득해 더 일찍 퇴사하지 않고 세월만 보낸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맞다. 회사에서 뺨 맞고 나에게 화풀이하는 중이었다. 퇴사하겠다고 결심했던 순간의 후련함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은 다 지워지고, 지난날의 후회와 자괴감으로 쪼그라들어 점점 낑깡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