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비용 30
퇴사 결정에 라스트 팡 역할을 했던 버킷리스트 두 번째, 유럽 여행이다.
(그때 나는 애인이 있었다) 애인과 함께 지금이 아니면 못 갈 거 같은 유럽 여행을 계획하며 '마음껏 퇴직금을 쓰고 오겠다' 룰루랄라 철이 없었다. 서른 전에 떠나는 생애 첫 유럽 여행은 마치 날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시켜줄 것만 같았고, 다녀온 후에는 여행에서 깨달은 지혜로 뭐든 척척해내는 신여성으로의 변신이 원 헌드레드 퍼센트 가능할 것 같았다.
여행을 위해 책을 사고(나는 종이책을 좋아한다) 보름간의 다양한 나라의 계절과 날씨를 고려해 짐을 싸고(그러나 배낭여행을 위해 이동이 편한 21인치 캐리어와 배낭 하나에 모든 짐이 들어가야 하고) 함께 여행할 애인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요즘 바쁘다. 애인은 아버지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져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기분도 상황도 좋아 보이지 않아 눈치가 보였지만, 괜찮다며 애써 밝은 척하는 애인의 애씀과 여행이 기대된다는 말에 곧 좋아질 거란 착하고 다정한 여자친구의 대사를 희망차게 사용했다.
내가 예약한 여행은 단체 배낭여행으로 세미 패키지여행과 비슷했다. 자유여행이지만 현지 가이드가 있어 각 나라의 숙소를 안내해 주고, 원한다면 가이드와 함께 여행할 수도 있었다. 일반 배낭여행보다는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안전을 위해 나는 이 여행 상품을 선택했는데, 예약 안내 사항에 특이점이 있었다.
"방 배정은 부부가 아닌 이상 동성끼리만 가능하다."
그럼 나는 애인과 일행임에도 이성이라 따로 지내야 하는 건가? 그것도 모르는 사람과?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여행사에 바로 문의를 했다. 해당 규정은 여러 여행 경험에서 결정된 사항이고, 다수를 위한 예방 차원에서의 규정이라는 것이었다. 짧아 보이는 보름이라는 기간은 생각보다 꽤 길어 커플들이 자주 다투거나 어떤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함께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팀원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런 규정이 도통 이해되지 않아 여행사에 근무 중이던 지인에게 물어봤으나 그런 규정은 처음 듣는다 했다. 강제성이 없다면 나는 이 규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여행사에 다시 한번 항의를 했다. 그러자 돌아온 답변이
"부모님의 여행 동의가 있으면 합방이 가능하다"
부모님 동의하에 같은 방을 쓰면 커플이 다투지 않는 마법이라도 걸린단 말인가? 어떤 우려를 하는지 이해는 가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여행사의 행태에 화가 났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온 여행을 이 규정 하나로 망치고 싶지 않아 나는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우리 엄마는 꽤 개방적이고 나를 신뢰한다) 초6의 여름방학 어느 날 좋아하는 친구네 집에서 저녁 먹고 자고 가도 되는지 몸을 배배 꼬며 엄마의 허락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엄마 나 애인이랑 여행 가는데 여행사에 허락한다고 말 좀 해줘 헿." 이런 난감하고 뭐라 설명이 안되게 모양 빠지는 부탁을 엄마에게 해버렸다.
나의 면구함을 높이 샀는지 여행사는 한쪽 부모님의 동의 만으로도 여행 기간 동안 애인과 함께 방을 쓸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여행 준비가 끝나고, 몇 주가 더 지났는데 애인은 더 바빠지고 갈수록 연락이 뜸해졌다.
여행 출발 일주일 전, 애인은 회사 때문에 여행을 못 갈 거 같다고 했다. 지금 취소하면 예약금은 모두 날리게 되는 상황인데 애인의 아버지가 다 지원해 줄 테니 일단은 취소하자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허락까지 구하면서 어떻게 예약한 여행인데.. 하지만 어쩌겠는가(그때 나는 애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예약금을 모두 날리고 여행을 취소해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이별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정말 몰랐을까?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아마 그는 나 몰래 조금씩 방향을 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별 비용으로 30만 원을 지불하고는 나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같은 여행사의 같은 여행 상품을 예약했다. 이별 따위가 나의 유럽여행을 주저앉힐 수는 없었다.
이번엔 반드시 떠난다.
퇴사 후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다.
첫 유럽 여행이다.
첫 홀로 여행이다.
신난다 신난다 신난다.
하나도 신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