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미학
퇴사 후 유럽 여행을 끝으로 나의 자유는 종료되었다.
긴 여행을 마치면 닿을 수 있을 거란 미래에 대한 해답은 그게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니라며 힌트도 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야박한 사람.
방황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데 그 일이 없으니 존재의 이유를 잃은 것만 같았다. 내 이름 앞에 붙이는 '어디 다니는, 무슨 일을 하는'의 강력한 힘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 직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우선 두 갈래의 방향으로 복잡한 선택의 길을 함축해 보았다.
1. 새롭게 관심이 가는 분야가 있나? 그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나?
– 딱히 그렇지 않다.
2. 기존의 일을 아직 하고 싶나? 그 일은 내가 잘하는 분야인가?
– 그렇다.
기존 분야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부족하다 느낀 외국어 실력을 보충해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다. 업그레이드된 내가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면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그곳에서 내가 무얼 배우고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궁금했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나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더 조오은 회사로.
다시 조정된 방향 앞에서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분명했다.
‘중국 어학연수’
늘 갈증을 느꼈던 외국어 공부를 위해 나는 어학연수를 신청했다. 내 목표는 단기간 내에 실력을 높이고 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회화 연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떠나기 전 미리 학원을 다니며 문법 공부에 매진을 했다.
설렘과 걱정을 안고 떠난 어학연수에서 나는 다양한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우정으로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배운 경험은 내 세상의 울타리를 힘껏 넓혀주었다.
그중 곧 서른을 앞둔 만학도인 내가 중국에서 공부를 하며 부러우면서도 안타까운 양가감정이 드는 순간은 이런 것이었다. 몇몇의 교환학생으로 온 한국 대학생들의 나태한 모습. 그들은 늘 수업에 빠지고, 기숙사 안에서 한국 프로그램만 보며, 한국인 친구들과만 어울렸다. 중국까지 와서 한국의 삶과 똑같은, 그보다 더 나태한 삶을 보내고 있다니. 그들은 부모님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저 자유롭게 청춘을 낭비하는 것이 마치 중요한 임무인 것처럼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청춘은 낭비가 미덕인가?
낭비인지 모르기에 아름답고, 지나고 나면 알기에 그립기만 한 청춘.)
그들은 20대 초반의 눈부신 시간과 그때만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낭비 좀 해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시간과 기회를 지금의 내가 얼마나 바라는지 그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낭비된 청춘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왜 어릴 때 못 놀아본 사람이 늦바람 든다고 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나도 어릴 때 실컷 낭비해 봤기 때문에 현재의 소중함을 아는 게 아닐까?
정답은 없다.
다들 지금의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 그 시절 나의 최선은 공부였고, 그들에게는 내가 모르는 다른 최선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뭐 어떤가? 모든 사람이 매 순간 최선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우린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대견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