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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Sep 22. 2023

미안함 대신 욕망

하고 싶지 않은 대화는 가능하면 피하며 살고 싶다.
어른이니까 하기 싫은 일도 씩씩하게 해내야 한다고 하던데.
어른이 되었으므로 가능하면 있고 싶지 않은 자릴 정확하게 알아보고 싶다.
미안해하며 머무는 대신 욕망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다.
- 시인 이훤 -

하고 싶지 않은 대화는 가능하면 피하며 살고 싶다.

하고 싶지 않은 대화엔 주로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도무지 진심이 들어가지 않는 말을 형식적으로 전달하는데 '이모티콘' 만한 것이 없다.

고맙다고 느껴지지 않는 직장 상사의 도움을 빙자한 충고.

단톡방에 상사가 올린 메시지에 대한 답변. 

 '네가 올린 글을 나도 보긴 봤는데 별 달리 할 말은 없어'라는 뜻으로 적당한 이모티콘을 날린다.


가끔 이모티콘의 웃긴 얼굴을 가면으로 만들어 내 얼굴 위에 덮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오히려 억울한 것은 내쪽인데 갑질 충만한 '고객님'에게 비굴한 '사과'를 해야 될 때,

하필 내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때 만난 상사에게 자본주의 미소를 날려야 될 때가 그렇다.



어른이 되었으므로 가능하면 있고 싶지 않은 자릴 정확하게 알아보고 싶다.

친한 사람과 시간을 보낼 때조차 에너지가 소모됨을 느끼기 때문에  집에서 혼자 에너지를 충전할 시간은 내게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약속이 잡히면 부담부터 된다. 약속을 지키느라 미처 다 채우지 못한 내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시간을 별도로 확보해야 되기 때문이다. 마치 수업을 빠지게 되면 보충수업 일정을 추가로 잡는 것과 같다. 결국은 더 바빠지고 힘들어진다.


이렇게 그룹으로 만나는 모임을 싫어하는데도 모임에 올 수 있냐는 형식적인 물음이 마치 거절하면 안 되는 명령처럼 여겨져 '당연히 갈 수 있지!'라고 답하곤 했다. 모이는 시간 내내 많은 얘기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역시 안 왔어야 됐어.'라고 후회하는 내 모습을 그릴 수 있지만 꾸역꾸역 모임에 나가곤 했다.



미안해하며 머무는 시간을 줄인다.

과회식, 팀회식, 전별회식, 환송회식, 동기모임, 00 부서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 모임, 여직원들끼리 모임, 고등학교 동창, 엄마들 모임, 조리원 동기모임, 00 구청 출신 모임, 어떤 특정인을 알게 된 사람을 중심으로 한 모임 등 내가 과연 '모임'을 싫어하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모임이 많다.

내 에너지를 전소시키는 모임에 참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소속감을 갖고자, 회사 내 이런저런 소문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 사람과 친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겉은 자발적이나 사실은 반강제적이어서 등 

모임에 나간 나는 늘 구석자리에 있는 그저 어색하게 웃는 모습을 띈 조각상이었다.

어쩌다 참석하지 않을 경우 내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사람, 나는 그저 1/N이었다. 


우울증과 섬유근육통으로 휴직을 한 후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한 사람과는 만나지 않기로 다짐했다. 

6개월이 지났고 나는 그동안 얼마나 내가 힘들도록 방치했었는지 깨달았다.


욕망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다.

지금의 나는 누가 만나자고 하면 구구절절하지만 뻔한 핑계를 대지 않고 솔직하게 거절한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혹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처음이 어렵지 몇 번 해보니 거절도 익숙해졌다. 

두세 시간을 어색한 웃음을 띠는 조각상처럼 사람들 속에서 앉아 있느니

혼자 집에서 독서하는 게 훨씬 편하다.

아들과 함께 놀거나 운동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욕망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내 시간을 계획대로 쓸 수 있는 지금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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