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에어컨을 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저녁이면 춥다고 생각될 만큼 가을을 느낄 수 있다.
달력을 보니 역시 백로(白露)가 지났다. 백로는 24 절기 중 열다섯 번째 절기로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기를 알린다. 백로가 지나면 더위가 한 풀 꺾인 게 확연히 느껴진다. 땀을 뻘뻘 흘리는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수확의 계절, 가을이 시작됐다. 나는 올해 무엇을 수확할 수 있을까? 계획에 없이 휴직하는 바람에 모처럼 편히 쉴 수 있었고 아들의 여름방학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받는 심리상담에서는 '치유단계'가 시작됐다. 어린 시절 나에게, 엄마에게, 할머니에게 그때 못 한 말을 하고 감히 두려워 내비치지 못했던 감정을 찾아 공감한다. 심리상담 선생님을 봄에 만났으니 벌써 세 계절을 함께 보낸 턱이다. 부모, 직업, 아이, 내 생각에 관한 기본정보를 모두 알고 계시는 선생님은 웬만한 친구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계신다. 지난주 수업이 세 번째 치유 수업이었는데 수업이 끝날 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주말 내내 생각났다.
"정말 간혹, 치유과정이 끝나도 달라지지 않는 분들이 계시는데 서진님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경우 깊고 강한 트라우마가 있는 경우거든요."
과거는 다 아름다운 추억 같은 내게 깊고 강한 트라우마라...... 뭘까? 이 얘기를 남편에게 하니 남편의 반응도 똑같았다.
"내가 널 거의 20년 동안 지켜봤잖아. 뭘 해도 변할 것 같지 않아."
변하지 않는 사람.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 졸지에 내가 치유되기 힘든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니면, 애초에 치유할 게 없는 사람이거나.
생각해 보면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내가 가진 칼날을 쓴다 해도 내게만 향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