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성장의 단계는 정해져 있다.
혼자서 고개를 가누고, 뒤집고, 배밀이를 한다. 또 혼자서 기어 다니고 앉았다가 마지막으로 걷는다.
아무리 귀한 아이라도 부모가 대신해 줄 수 없다. 생각보다 부모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아이의 성장 속도에 부모는 기다려 줄 뿐이다. 부모의 기다리는 시간이 길수록 아이가 성장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기쁨과 감사는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부모님은 더 많이 기뻐했고 감사했을 것이다.
느린 엄마를 닮은 아들 둥이도 또래에 비해 1년 반 정도 늦게 걸었다.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내딛던 둥이는 모든 단계에서 몇 달씩 늦었다. 말이 느려서 언어치료센터를 2년 넘게 다녔다. 걷고, 뛰고, 말하고, 글씨 적는... 성장 단계를 더 오래 기다린 만큼 우리 부부는 늘 더 감사했다.
아마, 엄마가 나를 키우면서 느꼈던 기쁨은 이보다 훨씬 더 컸을 것 같다.
‘부모가 없어도 아이는 자라지만, 아이 없이 부모는 자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엄마가 그랬 듯, 심약했던 난 둥이로 인해서 엄마가 됐고 점점 더 강해졌다. 둥이가 없었을 땐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당연히 해내는 억척같은 아줌마로 변하고 있었다. 어렸을 땐, 40살이 넘은 아줌마를 보면 참 재미없게 사는 것 같았다. '깔끔하지 않은 옷, 기미 가득한 피부, 거칠어진 머리, 아무 영양가 없는 수다 떠는 시끄러운 아줌마'... 그런 아줌마가 된 내 모습에 만족한다. 내 가족이 생겼으니깐. 너무 사랑스러운 내 아들을 지킬 수 있는 '강함, 억척스러움'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내가 갑자기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야리야리한 아가씨가 갑자기 아줌마로 변신한 건 아니었다. 둥이가 성장과정에 따른 과제들을 마칠 때마다 엄마인 나도 조금씩 강해졌다.
워킹맘이 되기로 마음먹었지만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2~3년 만에 업무가 바뀌어 여러 법규를 계속 익혀야 됐고, 다양한 민원을 접해야 됐다. 일은 힘들어도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예측 불가능한 '근무시간'이었다. 퇴근 후 집에 있다가도 태풍, 폭염 등과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어디에 있든지 1시간 내에 출근해야 된다. 뿐만 아니라, 퇴근시간 불과 30분 전에도 비상대기 명령이 떨어지는 게 다반사라 내 마음은 늘 조마조마했다. 업무용 메신저로, 방송으로... 퇴근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무척 혼란스럽다. 내 시간은 이미 조직의 시간이었다. 특히 코로나가 생긴 이후엔 더 심해졌다. 오전 8시 30분에 개최되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 준비로 오전 7시 20까지는 출근해야 됐다. 야근과 주말근무가 끊이지 않았다. 둥이 옆에 함께 있어줄 수 없어서 늘 미안했고, 친정엄마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아서 죄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워킹맘이란, '자신이 속해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온전하지 못하고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엄마'라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지만, 마음이 힘드니까 몸도 늘 개운하지 않다.
‘워킹맘’이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지만 이렇게 무거운 단어인지 그 전에는 미처 몰랐다. 한 여자의 인생 7할 이상을 차지하는 ‘엄마’라는 거대한 의미에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지속적으로 해야 되는 의미가 합쳐졌으니 둘 중 하나를 그만두기 전까지는 워킹맘은 아프거나 투정 부릴 여유조차 없다는 것을…
하지만 여유가 없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간들이 결론적으로 내게 도움이 됐다. 살기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익혔고, 우선순위 과업에 집중함으로써 나를 성장하도록 했다. 가정과 회사에서 꿋꿋하게 내 자리를 지키고 계속 키워 나갈 수 있게 도와줬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나만의 자리가 없는 것 같았고 어디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홀로서기를 결심한 때부터 외로움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정해진 삶을 사는 듯한 느낌이 아닌, 삶에 대한 애착으로 하루를 소중하게 살기 시작했다.
삶의 에너지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와 내 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엘리너 루스벨트' 말이 옳았다.
그녀는 '여자는 티백 같아서, 뜨거운 물에 빠지기 전에는 여자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라고 했다.
대부분의 여자를 강하게 하는 뜨거운 물은 아마, 사랑스러운 '자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