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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금 깨서 벤츠 사줄까?

by 이서진

"서진아, 적금 깨서 벤츠 사줄까?"

"왠 벤츠?"

"어떻게 해야 네가 행복 해 질까? 진급을 해도, 휴직을 해도, 여행을 다녀와도 넌 매일 점점 더 힘들어하잖아. 네가 그렇게 되고 싶어 했던 브런치 작가가 됐고, 글도 많이 쓰고, 너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둥이랑 주말마다 나가는데 넌 왜 더 힘들어질까?"

"나도 모르겠어. 근데 돈 있어? 웬 적금?"

"우리 적금 있잖아."

"그거, 작년에 나 휴직한다고 깼잖아. 그 돈 다 썼지ㅜㅜ 그리고 우리 형편에 웬 외제차?"

"아니, 요즘에 네가 뭘 해도 웃지를 않으니깐... 곧 복직이고, 새 차 타고 출근하면 좋을 것 같아서;"


열흘 전쯤, 걱정으로 시작한 남편의 위로는 결국 돈 없는 우리 집 경제상황만 확인시키며 어이없는 웃음으로 마무리됐습니다. '남편이 오죽 답답했으면 말도 안 되는 공수표를 날렸을까...' 싶어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일 동안 남편의 말이 머릿속을 맴맴 돌았습니다.

남편의 질문처럼 왜 전 계속 힘들다고 생각할까요?


영혼을 갈아 넣은 것처럼 애를 태웠던 진급도 무사히 했고, 6년간 절치부심(?)으로 기다린 육아휴직도 했고... 열 번째 만에 브런치 작가에 합격 해 미친 x처럼 마냥 행복해했던 시간도 있었는데 왜 그런 것들은 금방 잊히는 걸까요?


어제, 남편과 잠시 산책을 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오빠 지금 내가 일하면서 살림도 하지, 둥이 공부도 봐줘야 된다고! 학교 선생님도 학원 선생님도 다 엄마인 나랑만 얘기하려고 하잖아. 나 글도 적어야 되고 책도 읽어야 된다고. 복직 전에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도무지 시간이 안 난다고! 나 지금 연수중이잖아. 나도 다른 여자들처럼 집에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오빠 둥이 학원 스케줄 알아? 방과 후 수업을 몇 개, 무슨 요일에 하는지 알아? 둥이가 일주일에 일기를 몇 편 이상 적어야 되는지, 실로폰은 몇 번 이상 연습해야 하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을 난 다 기억해야 된다고!"

아... 결국 또 둥이 핑계입니다.

"미안해. 내가 조금 더 할게.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집에 돌아와선 아무 말 없이 '오케이 광자 매' 드라마를 봤습니다. 덕분에 우리 집은 오랜만에 조용한 토요일 저녁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됐습니다. 오전 8시 30분.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냅니다.

"서진아, 복직해야 돼서 마음이 답답한 거는 알겠는데. 그럼 넌 정말로 일을 그만 두면 행복할 것 같아? 오빠 생각엔 넌 퇴직해도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불만이 더 쌓일 것 같아. 돈을 떠나서 너한테 '직업'은 정말 큰 부분인데. 어디 가서 사람대접 못 받을 텐데... 일단, 둥이랑 지금 나가서 저녁까지 먹고 올 테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자. 자고 일어나서 기분 좋으면 글도 적고 드라마도 보고. 알겠지?"


남편은 제가 좋아하는 '바나나킥'과자를 또 언제 사둔 걸까요? 아, 저를 너무나도 잘 아는 남편!

생뚱맞게 바나나킥 과자를 보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워킹맘인 저는 항상 '전업주부'가 꿈이었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을 빌리자면, 저는 전업주부에게 백 번은 진 것 같았습니다. 아이와 매일 함께 할 수 있는 엄마들이 정말 부러웠거든요. 외근 중, 길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들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아기띠를 한 엄마가 부러워서 눈물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저 여자들은 무슨 복이 있어서 자기 새끼를 직접 키울 수 있는 걸까? 애가 아플 때 옆에 있어 줄 수 있겠지? 친정엄마한테 미안하단 말을 안 해도 되겠지?' 등 끝도 없는 부러움에 자괴감만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말을 듣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16년을 한결같이 '퇴직'과 '전업주부'를 꿈꿨지만 막상 일을 그만둬도 행복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또 다른 불만 대상을 찾겠지요. 오히려 '직장'이라는 제 모든 힘듦과 우울, 분노(?)의 대상이 있는 현재가 더 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탓하고 원망하고 다른 삶을 꿈꾸게 하는 커다란 표적이 있어서 그나마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듯이, 제가 직장생활을 하는데도 이유가 있겠지요?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선택할 수 없듯이, '직업'도 제 선택의 범위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싫어하는 제가 회사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를 운영하거나, 한 사람과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하게 됩니다.

혼자만의 세상에 파묻혀 있지 말라고 세상 속으로 저를 이끌어 주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하늘이 저의 숙제를 마쳐줄 것 같습니다. 이번에 복직하게 되면 열심히 숙제를 해 보려고 합니다. 최대한 집중해서 빨리 끝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예정입니다.


이유가 있어서 우울한 게 아니니 더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없는 우울... 이 어째 이상한 듯싶어 급하게 이유를 찾아봅니다. 어제, 오늘의 우울감은 한 달에 한번 돌아오는 생리증후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그때가 되면... 아주 그냥 땅 속을 파고들 것 같은 기분입니다. 누구 하나 죽이던지 아님, 내가 죽어야 될 것 같은 기분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이렇게 괜히 브런치에 화풀이 중입니다.


37살에 산부인과 진료 중, 의사 선생님은 제게 이미 갱년기가 시작됐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생리를 하지 않으면 평생 이렇게 다운된 기분으로 살게 될까 봐 무척 두렵습니다. 그때가 되면 가족의 평화를 위해 독립해야 될 것 같습니다.


혹은 그때는 정말 벤츠를 사야 될 것 같기도 합니다. 무척 비싼 자동차니까, 제 기분을 1%라도 업! 해 줄 수 있지 않을지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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