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하세요! 커피가 아닙니다.
20201. 9.28(화) 오전 10시!
친한 친구로부터 카톡 메시지가 왔습니다.
"생각보다 예쁘네. 너도 집 가까이에 스벅 있으면 갔다 와봐~"
'오늘 아침에 산 스벅 리유저블 컵'이라며, 테이크아웃 커피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저 위의 파란 글씨! 뒤늦게 생각해보니 친구의 말을 조금 더 귀 기울여 들었어야 됐나 봅니다. 비가 오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나 한결같이 새벽마다 등산을 다니는 친구가 한 말이라 '그러려니...' 넘긴 게 문제였습니다.
저처럼 게으른 친구가 한 말이었다면,
'나처럼 게으른 네가 웬일로 밖을 다 나갔데? 컵이 진짜 특별한 건가?'라고 의심이라도 했을 텐데요...
전 그저 '새벽에 등산하고 오는 길에 커피 한잔 마셨나 보구나.'라며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컵을 봤습니다. 예뻐 보였습니다. 며칠 전에 친정엄마가 무거운 텀블러보다 가벼운 다회용 컵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게 떠올랐습니다. 나름 효녀니깐(?) 이왕이면 엄마에게 스벅 리유저블 컵을 사드려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예쁘니까 제 것도 하나 사야겠습니다.
'이따 오후에 내 거랑 엄마 꺼 두 개 사야겠다!'라는 순진하고 깜찍한 생각을 했습니다. 컵이 얼마인지 검색해보려다 (그때라도 검색했다면...) 그것도 귀찮게 생각돼 스마트폰을 내려놨습니다. '매장 가서 계산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라고 또 한 번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스타벅스 리유저블 컵! 돈만 주면 언제든지 살 수 있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오후가 됐습니다. 커피믹스를 마시던 중 친구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스마트폰을 켜고 스타벅스 어플을 켰습니다. 저희 집에서 스타벅스 매장까지는 20 발자국도 체 안되기 때문에 보통 사이렌 오더로 주문합니다. 주문 후 집에서 출발, 도착과 동시에 커피 테이크아웃! 집에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기까지 5분도 안 걸립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리유저블 컵을 득템 하지 못했습니다 ㅠㅠ)
잉? 난생처음 본 화면이 뜹니다.
동시 접속자가 많아 잠시 대기 중입니다. 예상 대기시간 03분 17초.
대기인원 1,089명
이런 메시지를 보고도 여전히 저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환경이 살짝 열악한 관공서에 근무한 탓에 당연히 전산서버가 다운됐으려니 생각했습니다.
'날씨가 습해서 그런가... 스벅처럼 글로벌 기업도 별 수 없구나.'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참 당연스럽게도 했습니다. 이번 주 비 예보가 있어서 그런지 몸이 나른해집니다. 세수를 하고(잠을 깨기 위함이 아님ㅋ) 몇 분간 냉장고 속에서 시원해진 마스크팩을 얼굴 위에 올렸습니다.
몸은 따뜻, 포근한 이불속, 얼굴은 시원&촉촉~!
예뻐지는 시간은 언제나 행복합니다.(안타깝게도 저만이 느낄 수 있는 '예쁨'이지만요...)
한참 동안 푹~ 아주 잘 자고 부스스한 몰골, 잠옷 비스무리 한 이지웨어,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스벅으로 향했습니다.(얼굴을 반쯤 가리는 마스크가 있으니 세상 든든합니다.)
스타벅스 매장에 도착하자마자 진열장으로 향했습니다. 텀블러가 아니라서 그런지 사진 속 그 컵이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몰라서 원두커피 진열장도 꼼꼼하게 봤는데 역시나 보이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카운터에 가서 점원에서 물었습니다.(왜냐면, 전 구매 의향과 구매력이 있는 고객이니까요)
"진열장에 리유저블 컵이 안 보이는데, 두 개 주시겠어요?"
"네?"
"(분위기상 조금 기가 꺾여서;) 아니... 리유저블 컵이요. 사려고 왔는데 진열장에 안 보이네요."
"그 컵은 판매되는 게 아닙니다. 50주년 기념으로 만든 건데 커피를 주문하신 고객님들께 선착순으로 드렸고 저희 매장은 이미 마감됐습니다."
"아, 네... 그럼... 카페모카 한잔 주세요. 휘핑크림 올려서요."
무안해진 저는 괜히 제가 알고 있는 커피 메뉴 중 가장 비싸고 화려한 것을 시키고 얼른 뒤로 빠졌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스타벅스 리유저블 컵'을 검색해봤습니다.
여기저기 난리도 아니었다는 것을, 모든 일이 끝난 후에야 알게 됐습니다.
둥이를 임신했었던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직장도 똑같고, 같은 날짜에 결혼했고 신혼여행지도 비슷한 곳이라 공항에서도 만났던, 인연이 깊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비슷한 시기에 임신까지 돼 출산 준비도 같이 하게 됐습니다. 친구가 먼저 물었습니다.
"서진아, 유모차는 샀어?"
"응! 넌?"
"나도 샀어. 스토케에서 샀어."
"스토... 뭐? 스토케? 난 아가방에서 샀어. 할인해서 35만 원이라고 하길래 얼른 샀지."
"어;; 좋은 거 샀네."
게으름에 검색을 안 했던 것은 그때도 마찬가지라 아기용품 브랜드는 제가 어릴 때부터 쭉 있었던 '아가방'만 알고 있었습니다. 수백만 원짜리 유모차를 몰라 본 저에게, 아가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싼 유모차라고 말하지 않았던 친구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입니다. 백화점 문화센터를 가니 모두 이상하게 생긴 유모차를 밀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스토케'였습니다. ㅠㅠ
그 후, 십 년이 지났지만 저는 여전히 여기저기 뒷 북만 치고 있습니다. 리유저블 커피 컵을 샀다던 친구는 그 컵을 구매하려고 스벅에 갔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우연히 커피를 마시게 됐고, 그 덕분에 득템 했던 거지요. 하지만 귀한 컵이라서 저한테 카톡을 보냈을 텐데,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습니다. 역시나 마음 넓은 친구는 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줍니다. 뒤늦게 부러운 마음을 담아서 카톡을 보냈습니다.
"00야, 그 컵이 진짜 대단한 거였네! 너무 좋겠다!! 네가 말했을 때 바로 샀어야 됐는데 ㅠㅠ 사이렌 오더가 안 됐을 때라도 눈치를 챘어야 됐는데, 진짜 몰랐어."
"그다지 쓸데도 없는 컵인데 뭐... 근데 사이렌 오더가 뭐야?"
음... 알고 보니 친구는 사이렌 오더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스타벅스 매장 코 앞에 살고, 사이렌 오더도 알지만 게을러서 리유저블 컵을 결국 얻지 못한 저와 달리,
친구는 부지런히 새벽마다 운동을 다닌 탓에 그 귀한 컵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제가 구독 중인 브런치 작가님께서 언급하신 '운칠기삼'이 떠올랐습니다. 분명 운이 중요하지만 순서는 '기'가 먼저인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친구는 부지런(기)했던 덕분에 우연히 리유저블 컵(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운이 더 중요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다 내가 결승전에 설 수 있는 자격을 갖췄을 때의 일이다. 한번 더 강조하지만, (운칠기삼 중) '기삼'이 충족되어야 '운칠'이 힘을 발휘한다. 운이 기보다 더 중요할 수 있겠지만, 순서는 분명 기가 먼저다. <럭키 중>
스타벅스 50주년과 세계 커피의 날(10월 1일)을 기념하고 일회용 컵 사용 절감에 대한 친환경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기획된 '스타벅스 리유저블 컵 데이!'
하지만 코로나 시국에 과도한 경쟁이 예상되는 한정판 마케팅을 펼쳤다는 것, 공짜로 얻은 컵을 비싸게 되파는 리셀러로 인해 행사의 의미가 조금 퇴색한 것도 같습니다.
'스타벅스 리유저블 컵'! 생각해보면 꼭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커피믹스를 사면 무상으로 증정되는 텀블러와 머그컵이 주방에 넘칩니다. 넣을 곳이 부족 해 필요 없는 컵을 주기적으로 버려도 항상 넘칩니다.
다혈질인 제 성격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갖지 못해 안타까워한 것은 '스타벅스 리유저블' 컵이 아니었습니다.
집 근처에 매장이 있고, 그때 바로 샀더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는데도 놓친 것 같은 커피 컵은 제게 '기회'였습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제가 놓친 것 같은 '행운'말이죠. 지척에 있어 잡을 수 있었는데 내가 게을러서 놓친 '행운', 이루지 못 한 '내 꿈!' 정보를 늦게 알아서 있는지도 몰랐던 '소중한 기회'
이 컵을 얻기 위해 스타벅스 매장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이 얻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파트 신규 분양 당첨권', '시험 문제 답안지'등과 같이 비밀스럽고 귀한 것을 나만 갖게 된 느낌과 비슷한,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스타벅스 리유저블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면 마법이 일어나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나만 벼락 거지가 된 것 같은 절망감! 나만 안 풀리는 것 같은 패배감, 무력감!'들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면 '나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함! 나에게만 온 기회! 나도 이뤘다는 성취감!'으로 바뀌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스타벅스에서 이런 마법의 커피를 제조할 수 있을지 궁금하지만, 이런 커피가 판매된다면 그때는 부지런히 움직여 꼭 사서 마시겠습니다.
('다음'을 기약하게 만드는 것도 스타벅스의 마케팅 전략이겠죠? 알지만 거부할 수 없으니 다음번에는 잘 휩쓸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