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야, 황금연휴 잘 보냈니?
이모에게는 24절기를 챙기는 습관이 있단다. 열두 달로 이뤄진 달력에 비해 24절기를 정성스럽게 기다리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더 잘 느낄 수 있거든. 덥거나 힘들 때는 유독 더 챙겨보게 돼.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잘게 나누고, 한 고비 한 고비 넘기다 보면 어느덧 힘든 시기가 지나가 있거든. 또, 한 고비를 넘긴 스스로를 격려하고 쉬어갈 여유를 가질 수도 있어. 그래서 매년 여름의 시작, 입하(立夏)부터 선선해지는 처서(處暑)까지는 손꼽아가며 챙긴단다.
며칠 전, 한로(寒露)가 지났더구나.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뜻의 절기! 숨이 간당간당할 만큼의 더위가 끝났다고, 한 숨 돌릴 만큼의 차가운 공기를 요 며칠 느껴 봤다고, 절기가 지나는 것을 놓쳐버린 이모는, 스스로 '참 가벼운 사람이구나...'라며 다시 한번 반성했단다. 한로가 지났으니 앞으로 남은 절기는 7번! 남은 절기들을 정성스럽게 맞이하려고 해. 그러려면 소중하고 귀하게 시간을 보내야겠지?
몇 번 남지 않은 절기처럼 올 한 해, 이모가 지아에게 해 줄 이야기도 다 돼 가는구나. 지금의 너에겐 어른들의 이야기 일 뿐이겠지만 언젠가 지아의 삶이 될 수도 있으니 열심히, 솔직하게 적고 있단다. 지아에게는 다소 지루 할 얘기 일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잘 들어줘서 고마워.
지난주엔, '안정된 가정생활을 하는 데 도움 되는 공무원의 좋은 점'에 대해 말했잖니? 이번 주에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 되는 것'에 대해 얘기해 줄게.
첫째, 공무원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므로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을 살아가기에 수월하단다.
지아도 학교에서 배웠겠지만 법치주의란, '국가의 권력 작용은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야. 우리나라 현행 헌법에는 법치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명문규정은 없으나 헌법 제12조 제1항, 적법절차 원리, 권력분립주의, 헌법재판제도와 같은 구현원리는 규정되어 있어.
헌법
제12조 ①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ㆍ구속ㆍ압수ㆍ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ㆍ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즉, 우리 헌법은 국가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려는 법치국가의 실현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어. 그리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려는 가장 기본적인 헌법부터 민법, 형법 등 여러 법률이 있단다.
공무원은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법률을 집행하는 사람이지. 물론, 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판사, 검사, 변호사, 법무부 공무원에 비하면 신생아 수준이지만 법의 '집행'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돼야 한단다. 그리고 전문가가 죄기 위해서는 업무에 맞는 다양한 법률을 숙지해야 돼.
가장 흔한 '계약'을 예로 들어볼게. 대규모 건설공사 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지방자치단체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건설산업 기본법, 건설기계 관리법,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등을 모두 정확하게 숙지해야 된단다. 물론, '민법, 국세 기본법, 국세 징수법'등도 포함되지.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 '노인복지'에 관한 업무를 본다고 하면, '노인복지법, 기초연금법, 노인장기요양보험법, 대한노인회 지원에 관한 법률, 장사 등에 관한 법률,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등을 숙지해야 돼. 노인복지시설 설치 및 운영에 필요한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법, 자연재해 대책법, 사회복지사업법' 등도 있지.
지아는 혹시 우리나라 법 단계가 '헌법-법률-명령-규칙'으로 분류되는 것 알고 있니?
먼저, 헌법은 국민투표에 의하여 제정한 국가의 근간이 되는 법이지. 그리고 헌법의 범위 내에서 국회에서 제정하는 법률, 이 법률을 시행하기 위하여 대통령이 발한 게 대통령령(명령)이야. 마지막으로 시행규칙은 시행령을 시행하기 위한 구체적 세부사항을 각 부 장관이 규정한 부령이란다. 이 외에도 업무지침, 규정에 해당되는 예규 등이 있어. 따라서 업무별로 최소 5개 법률이 해당되고 법률에 따른 시행령, 시행규칙, 예규를 모두 감안한다면 20여 개나 되는 법률, 지침을 봐야 된단다. 어마어마하지? '법대로만 해서 고리타분한 공무원!'이란 오명이 나올 수밖에 이유지. 법률과 지침이 매우 구체적이고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재량의 범위가 적은 게 현실이란다.
더욱더 놀라운 점은! 이렇게 많은 복집 하고 다양한 법을 업무에 투입되기 전 익힐 수 없다는 것이야. 모든 업무는 '무(無), Zero!'부터 시작된단다.(답답해 미치지 ㅠㅠ) 공무원은 보통 2~5년마다 근무하는 부서가 바뀌는데 내가 어디로 갈지 미리 알 수가 없단다. 그저 인사명령이 게시판에 뜨면, 2~3일 뒤면 무조건 새로운 곳으로 출근해야 된다는 것만 알아. 그러니 이렇게 업무가 바뀔 때마다 최소 3개월은 새로운 법규 공부로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단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답답해서 하게 되지. 아주 간단한 예로 이모가 공무원으로 임용되자마자, 임용장을 받은 첫날, 그냥 동사무소 민원대에 앉혀진 거야. 등본, 초본이 뭔지도 모르고 주민등록법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데 민원의 개인정보가 담긴 서류를 발급해주고 주소가 바뀌는 전입신고를 할 수밖에 없지. 채권자, 가정폭력 가해자는 채무자와 가족들의 주소를 당장 알려달라고 성화고, 채무자와 가정폭력 피해자는 알려주면 죽인다고 성화고... 이 상황이 가장 황당한 것은 나인데ㅠㅠ 답답하다고 욕하며 기다리는 민원인의 줄은 갈수록 길어지고. 이런 기막힌 생황이 평생 반복되는 곳이 공무원이란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며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법률을 익힐 수밖에 없어. 발령 첫날부터 민원응대와 행정처분을 해야 되기 되거든.
비슷한 업무를 전문적으로 평생 하게 되는 기술직렬과는 달리 행정직은 다양한 분야에 투입되기 때문에 '교통, 재난, 문화, 예술, 사회복지, 행정, 기획, 예산, 일자리, 녹지, 건축행정' 등 사회 전반적인 법률을 두루 알 게 된단다. 스트레스가 무척 높지만 덕분에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진 것 같아. 그리고 소송 업무에 필요한 대부분의 '변론서'도 담당 공무원이 직접 작성한단다. 앞에서 언급한 법조인들처럼 법적 처리절차,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부분은 모를 수 있지만 '이럴 땐 어느 법률을 봐야 하는지, 어떤 부서에 문의해야 되는지'등은 자연스럽게 알게 돼. 살면서 법원에 갈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라도 가게 된다면 '당황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니깐! 이럴 땐 공무원으로 일한 게 도움이 된단다.
글 적는 것을 좋아하는 이모가 최근 좋아하게 된 말은 '즐거운 일뿐만 아니라 힘든 일도 나중에 좋은 글감이 된다!'는 것이야. 의미 없는 경험이 없지. 공무원 생활이 딱 그런 것 같아! 새로운 법을 공부해야 될 때마다 어렵지만, 법을 보고 적용하는 아주 기본적인 능력은 얻게 된 것 같아.
둘째, 공무원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이해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단다.
일을 하면서 공무원처럼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직업이 또 있을까? 보통 특정하고 전문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민간기업과 달리 순환보직을 하는 공무원은 정말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단다.
기초수급자부터 지역 자산가까지, 사회복지사업가, 택시기사님, 선생님, 경찰, 소방관, 산지기 아저씨, 농부 아저씨, 화가, 자원봉사자, 다른 지역 공무원, 다른 부서 공무원, 다양한 분야의 사장님, 자산 기부자, 건축가, 법무사, 변호사, 건설 노동자, 건설기계장비업자, 소상공인, 초등학생, 부녀회원, 새마을 단체 회원들, 청소년, 대학생 등이 이모가 16년 간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이야. 어때, 정말 다양하지?
단순한 일회성 만남이 아닌 함께 사업 파트너 등의 관계로 만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시간이 비교적 충분하단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어려운 점이 있는지 어떤 지원을 필요로 하는지 많이 듣게 돼. 특히, 사회복지 부서에 근무하면 민원인 개인뿐 아니라 가족의 깊숙한 부분까지도 알 수 있어. 이렇게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 해 자원봉사, 기부를 원하시는 분과 필요로 하는 분을 연결 해 주기도 하고 사업을 동시에 추진 해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한단다. 물론, 그들의 슬픔에 너무 깊게 공감하지 않게 마음을 다잡아야 될 때도 있어.
일을 통해 사람을 사귀고, 그 사람과 세상을 배울 수 있다는 것! 내 일을 통해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내가 사는 곳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 정말 멋지지 않니?
이모가 생각하기에 공무원은 딱 '세상의 중간, 가운데'에 있는 사람 같아.
딱 가운데에 위치 해 이곳저곳,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게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 같아. 나와 다른 상대방의 행동과 특성을 이해해야 되고, 다양한 사회를 엿보기 위해 끊임없이 법을 익혀야 되고, 가슴 아픈 사연을 자주 듣게 돼 힘들 때도 있지만 보람도 있단다. 이곳저곳에서 본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잊지 않고 있다가 서로 이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들을 이어주는 것 또한 공무원이거든!
이제 이모가 '어떤 일을 하는지, 왜 매일 힘들다고 하면서도 그만두지 않는지'에 대해 알 것 같지? 모든 직업은 겉에서 보는 것과 다른 면에 분명히 있단다. 화려하고 멋져 보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고 어두운 면이 깊을 수 있어. 지난 편지에서도 적었듯이 이모가 지아에게 바라는 건,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이해보단 사물과 현상을 볼 때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란다. 이모의 글이 그런 면에서 지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다음 편지에서 또 보자^^